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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가문 장남인 이맹희의'숨겨둔 이야기'
<단독 인터뷰>동생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성공위해 “유랑생활”

삼성그룹 창립자였던 고 이병철 회장의 큰아들 이맹희는 최근 지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삼성그룹 창업회장의 큰아들로서 최대기업의 성장의 내면사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1993년에 <묻어둔 이야기>라는 회고록을 펴내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그는 이 회고록에서 자신이 삼성그룹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 사연도 공개했는데, 장자상속을 못한 가슴 아픔이 담겨져 있다. 그는 이병철의 큰아들로 태어나 한때 삼성을 위해 봉사한 최고경영자 중의 한 명이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성공과 삼성그룹의 쉬지 않는 발전 이면에는 그의 형인 이맹희의 밀알같이 썩어져 새싹을 틔워준 자기희생도 곁들여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필자는 1990년대 초 이맹희와 여러 차례 단독 인터뷰를 가진 바 있다. 그의 회고와 회고록을 기초로, 이맹희가 동생인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성공을 위해 밀알처럼 썩어졌던, 숨겨져 있었던 스토리를 공개한다.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큰아들 이맹희는 아버지와 대립(?)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이 회장이 작고한 이후 육신적으로는 아버지이지만 경영자로서의 아버지 이병철 회장을 존경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돈보다 인재 아낀 이병철



▲ 이맹희 ©문일석 촬영



우선 이맹희는 아버지가 치열한 삶을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나는 경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일생을 치열하게 살았던 모습으로도 아버지를 퍽 존경한다. 내가 나의 아버지라고 해서 그렇게 존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이해하리라 믿는다. 항상 일상생활에서도 퍽 존경할 만한 점들이 많았다"면서 "바로 일상생활에서 보여준 것은 정확한 일과이다. 워낙 매일의 일과가 시계바늘같이 정확한 주변 사람들이 정해진 일과대로 맞추어 드리기만 하면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퇴근 후에 집에 돌아오면 식사를 하고, 저녁 8시면 늘 목욕을 하는데 목욕물의 온도도 일정해야 했다. 1도 정도의 수온 차이를 쉽게 알아차리기 때문에 언제나 목욕물의 온도를 맞추는 것은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평생을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맹희는 아버지 이병철 회장에 대해 "기상시간도 늘 아침 6시였고, 일어나기 전에 가만히 누워서 이것저것 생각을 하곤 했다. 아마 중요한 결정 등은 이 시간에 하는 것 같았다. 퇴근은 저녁 6시인데 일을 하다가 시계도 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6시였다. 더러 시간이 틀린다 해도 5분 정도의 차이였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늘 밤 10시에서 5분 정도의 오차 밖에 없었다. 평생을 두고 어김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인재 제일주의 기업경영 핵심

세상에는 이병철 회장이 돈을 아꼈다고 하지만 가까이서 본 이병철 회장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맹희는 "아버지가 소유에 대한 욕망이 강했던 편은 아니었다. 그저 보고 즐기는 편이었고 단 한 가지 상당히 욕심을 내고 소유하기를 원했던 것은 잘 지은 한옥이었는데 결국 노년에는 용인에 있는 한옥에서 소일했다. 한옥 이외에는 큰 소유의 욕심을 가진 것이 없었다"면서 "주변사람들에게 엄하게 대하면서도 아버지가 평생 동안 제일 아꼈던 것은 바로 사람의 능력이었다. 삼성의 인재 제일주의는 평범한 말이 아니라 아버지가 평생 동안 좌우명으로 삼았던 기업경영의 가장 핵심적인 주체였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이병철 회장은 인재선발에 누구보다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이맹희는 "면접시험을 볼 때 역술가나 관상가를 옆에 두고 관상과 사주를 보았다는 이야기는 잘못 전해진 것이다. 워낙 험한 시대에 사업을 하다 보니 더러 주변 사람들이 아버지의 사주를 여기저기 들고 다녔는지는 모르지만 입사 시험장에 역술가가 있었다는 것은 와전이다"면서 "입사시험에서 사람을 골라 뽑는 것을 중히 여기긴 했다. 그래서 이틀이나 사흘 동안 계속 면접을 보기도 했는데 면접 중간에 아버지가 화장실에라도 가면 다른 면접위원들이 수험생을 자연스럽게 앉혀두고 아버지가 올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아버지는 면접자의 서류에 o표를 하시면 무조건 합격을 시켜야 했고, ×표는 아무리 면접위원들이 좋게 판단을 해도 탈락시키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 >표로 이 표시는 면접위원들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뜻이었다"고, 옆에서 직접 본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이맹희가 곁에서 본 이병철 회장

천하의 이병철 회장도 사람을 뽑는 데 대해서만은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맹희는 "과연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을 뽑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버지도 평생 동안 어려워했다. '사업의 승패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는데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반반의 확률밖에는 자신이 없다.' 아버지는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늘 힘들다면서, 당신께서도 사람을 잘 판단한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 확률이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밝힌 적이 있다"라고 공개했다.

이맹희는 종국에는 부정(父情)에 맞선 자신이 패배자였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겉으로는 물 흐르듯이 고요하지만 속으로는 그토록 깐깐한 분에게 아들인 내가 맞서서 고집으로 부딪혔다는 것은 잘잘못을 넘어 송구스러운 일이다."

이맹희는 평생 동안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는 자신이 삼성의 후계자가 되리라 생각했지만, 후계자 자리가 동생인 이건희 회장에게 돌아가자 부산에서 소일했다. 하지만 그는 이병철 회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유일한 혈육이다. 가장 오랜 시간을 곁에서 지켜본 이는 큰아들 이맹희이다. 긴 세월 동안 아버지와 대립적 관계를 유지했던 이맹희는 아버지가 작고한 이후에 "아버지는 거인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맹희는 "하나의 인간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아버지가 가진 가장 특징적인 장점은 '절제'였다. 아버지는 멈추어야 할 때와 나아가야 할 때를 정확하게 판단했고, 당신 스스로 그 진퇴에 관한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가진 분이다. 아버지가 평생 살아가면서 보여준 절제의 모습들은 퍽 많다. 우선 아버지는 감정을 절제했다"면서 "항간에 한비를 헌납하고 나서 혹은 동양방송을 헌납하고 나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그건 전부 사실이 아니다. 한비를 헌납하고 난 뒤에도 잠도 잘 자고 일상생활도 한치의 오차 없이 종전 그대로였다. 그런 일로 흔들릴 분이 아니다. 아들인 내가 곁에서 지켜보아도 어떻게 감정의 흔들림이 없이 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라고, 곁에서 본 이병철을 그렇게 그리고 있다.

좋다, 싫다 표현 드러내지 않아

이병철 회장은 오늘의 삼성그룹의 뿌리적 인물이다. 삼성을 만드는 정신이나 행동 속에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이맹희의 회고는 주목을 요한다.

이맹희는 아버지에 대해 "좀체 화를 내는 법도 없었고 호불호를 겉으로 드러내는 경우도 드물었다. 큰소리와 욕설은 물론 보고를 받을 때마저도 겉으로 좋다, 싫다는 표현을 쉽게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일을 보고하면 듣고 있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 그건 대단한 찬성 표시였다. 눈빛과 분위기로 찬성인지 반대인지를 구분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아버지를 모셨던 임원들은 대부분 그 무언의 대화를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정확하게 읽어내곤 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는 이어 "보고를 받다가 딴전을 피거나 엉뚱한 곳을 보면 그건 반대한다는 뜻이었다. 싫다, 좋다는 직설적인 표현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보고하였을 때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건 찬성이었고, 그대로 시행해도 별 탈이 없었다. 아버지 앞에서 꼭 필요한 말을 제외하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평생 동안 아버지가 큰소리를 내면서 웃는 모습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궁금하다. 내가 알기로는 아버지와 농담을 나누는 분들도 정해져 있었다. 삼성은 임원들이 그 앞에서 농담을 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아버지가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경영하던 시절의 초기 경제인 중 일부가 아버지와 농담을 나눈 사이였다. 당시 한국유리의 최태섭 사장과 한국화약그룹 김승연 회장의 부친 김종희 회장, 천우사 사장 전택보 정도가 그런 분들이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거인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일본어를 잘 하는 경영인이었다. 특히 신년에는 동경에 머물면서 동경구상을 했던 경영인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일본에 지인(知人)들이 많다.


▲ 이맹희 ©문일석 촬영


이에 대해 이맹희는 "아버지를 모시고 일본에서 정치인이나 경제인들과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아버지에 대해서는 늘 조심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일본전기의 고바야시 사장, 미쯔이 부동산의 하세가와 사장, 미쯔이물산의 사장 정도가 아버지와 그래도 편안하게 농을 하는 사이였다. 아버지의 경제인으로서의 능력은 한국보다도 일본에서 더 높게 인정받았다는 느낌도 든다"고 말하면서 "내가 만난 일본인들의 더러 나에게 '리상(아버지를 친근하게 이렇게 불렀다)은 하다 못해 일본에서라도 태어났으면 세계적인 경제인이 되었을 텐데…'라고 아쉬워하곤 했다"고 전하고 있다.

고통의 세월을 보낸 이병철 회장의 큰아들 이맹희는 "나의 아버지는 거인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맹희는 삼성그룹 창업자의 맏아들로서 후계자가 되기를 꿈꿨다. 아니 당연하게 그 자리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버지 이병철과의 팽팽한 긴장관계가 결국 그 자리를 거머쥘 수 없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이맹희는 "유언장이 공개되기 전에 있었던 '유언장을 바꾼다'는 말은 '맹희 너한테는 한푼도 물려 줄 수 없다'는 뜻임을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런 참에 '1976년, 아버지가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그렇게 당신의 후계구도를 직접 밝혔다. 결국 그 후 현실로 나타났지만 나는 후계 구도뿐만 아니라 유산분배에서도 철저히 배제되었다"고 실토했다.

이맹희는 "한때는 당연히 후계자가 되리라고 믿었다"고 했다. 그는 "젊은 30대와 40대 초반의 정열을 불태운 곳이 바로 삼성이다. 그리고 그 기업의 경영자는 바로 아버지였고 나는 그 맏아들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토록 냉엄하게 돌아선 것이다"면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부자지간에 작은 마찰이 있다 해도 서로 대화로 풀어 가면 될 것 아니냐?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용서를 비는 게 뭐 그리 힘든가? 한 마디만 잘못했다고 사과하면 될 것 아닌가?'"라고 여운을 남겼다.

하지만 "더러 나에 대해서 호의적이라면 내가 결정적으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나를 그렇게 배척한 아버지가 냉정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모든 평가는 나와 아버지에 대해서 그리고 최고경영자가 어떤 것인지 모르고 하는 이야기들이다. 아버지는 여느 경영자와는 다른 독특한 면을 많이 지니고 있던 분이다. 성격이 특이하다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말하고 있다.

내 자존심을 조금만 죽였으면…

이맹희는 스스로를 '불칼 같은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나는 사주 관상 등을 믿지 않지만 더러 주변 사람들이 내 사주를 풀어와서 전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느 것에나 공통적인 요소가 하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로 '불(火)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 방면에 대해 조예가 깊지 않기에 그이들에게 불이 많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 보았더니 '불'이라는 것은 공격적이고 성격이 급하고 강한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내 사주에 있는 불은 그저 작은 불이 아니고 마치 태양처럼 강렬한 불이며 일단 유사시엔 사주의 여덟 글자가 모두 불의 성격으로 변하는 특이한 사주를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면서 "내 사주는 일을 할 때 앞뒤를 재지 않고 고집을 피우고, 자존심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센 것이라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나를 잘 아는 이들이 날더러 '성격이 급하다, 불덩이 같다'는 평가를 하는 것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더러는 나를 두고 '불칼 같다'고도 하니 이 평가는 맞는 것 같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나는 여러 번 아버지 곁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 내 자존심을 조금만 죽이고 아버지 곁에서 기다렸으면 모든 문제는 잘 풀릴 수도 있었다. 아니, 아버지 당신께서 여러 번 그런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회마저 강하게 거부했다. 나와는 달리 실제적으로 큰 잘못을 저질렀던 창희는 무려 3년 간을 아버지 곁에서 몸을 낮추고 기다린 결과 용서를 받았다"라고 속사정을 실토하고 있다.

"인간적 감정으로 아버지 미워해"

이병철의 큰아들 이맹희는 "아버지를 미워했으나 이제는 이해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나는 용서받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일본과 국내의 사냥터로 혹은 여기저기 전국으로 쏘다닐 때 아버지는 여러 번 나에게 곁에 있으라는 의미의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때마다 그것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온 사람을 혹은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서 나에게 압력을 가하던 사람을 폭행하는 등 완강한 몸짓으로 거부했다. 내 불같은 성격 때문이었다"면서 "아버지가 냉혹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분명 냉정한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아들이라서 아버지를 변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는 최고 경영자로서 냉정해야 하고 냉혹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러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한비 사건 같은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며 지극히 비우호적인 박 정권 아래서 오늘날의 삼성을 지키고 발전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아버지와의 길고 긴 미움의 감정을 잠재웠다.

이맹희는 "이젠 다 잊었지만 한때 나는 아버지를 인간적인 감정으로 미워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나 이제나 나는 아버지를 이해한다. 아버지의 위치가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라고 회고했다.

삼성대권 유언, 이맹희 충격!!

이병철 회장이 창업한 삼성그룹의 후계, 즉 삼성그룹의 대권은 이건희 회장이 차지했다. 당시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큰아들이었던 이맹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장자 상속의 전통이 이어져온 우리나라 풍습으로는 당연히 큰아들인 이맹희가 삼성의 대권을 차지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결과는 이맹희가 아닌 이건희에게로 돌아갔다. 그 이후 삼성은 승승장구, 한국 최대 재벌로 성장했다.

삼성의 대권승계 문제는 아직도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장자인 이맹희가 생존해 있고,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삼성 대권과 관련, 문서화된 유서는 없었다는 게 이맹희의 증언이다.

이맹희는 "삼성의 대권승계를 이야기하면 누구나 삼성을 건희 체제로 만들면서 아버지의 유서를 통해서 승계했다고 믿는 것 같다. 사실 아버지는 어머니나 누이 혹은 창희를 통해서 여러 차례 나에게 '서울로 올라와서 내 밑에서 무릎 꿇고 사과한 다음 다시 내 밑에서 일을 하라'는 전갈을 보내며 유서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었다. '유언장을 바꾼다'는 말은 그 이전의 내용은 나에게 유리하게 작성되어 있었는데 내가 아버지에게 계속 굽히지 않고 버티면 유언장의 내용을 나에게 불리하게 바꾸겠다는 이야기였다. 한때 나에게 전해졌던, '삼성을 없애겠다,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 뜻을 품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말을 듣지 않으면 삼성을 없앨 수도 있으니 빨리 나한테 와서 내 말을 들어라'는 뜻이었다"고 설명하면서 "그러나 아버지는 바깥에서 이야기하는 식의 유서를 만든 적은 없다. 아버지의 유언은 모두 구두였고, 우리 식구 이외에 그걸 증명할 사람은 신현확 그분이 유일하다. 그분은 그야말로 반세기 가까이 아버지와 삼성 그리고 우리 집안과 인연을 맺은 분인데 나는 경영인으로 혹은 관리로, 나아가서는 인생 선배로 그분을 존경한다"고 덧붙였다.

이맹희, 삼성과 냉엄한 결별

삼성그룹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의 큰아들 이맹희는 1973년 무렵 삼성과 결별, 끝내 삼성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는 당시 삼성그룹의 경영자로서 사실상 2대회장의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눈에 들지 않아 삼성을 떠나야 했던 비운의 황태자(?)였다. 그는 아버지의 "얼음장처럼 차디찬 결정"에 따라 삼성을 나오게 됐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맹희는 "당시 아버지(이병철)는 1970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그룹으로 다시 복귀하겠다는 사인을 보내고 있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내가 아둔해서 그걸 깨듣지 못했던 것이다. 1972년 무렵엔 거의 완전하게 복귀 준비를 했다. 우선 삼성 본관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말하자면 전면에 나설 준비를 완료한 것이다. 예전엔 나에게 일체를 맡기신 일들을 직접 챙기기 시작했으며 그 이전보다 사장을 불러서 직접 지시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고 회고했다. 이어 "당시 이진석 비서실장을 시켜서 사방들을 호출하는 일도 잦아졌고 늘 임원 서너 명을 데리고 뭔가를 챙기거나 지시하는 모습도 많이 지켜볼 수가 있었다. 내가 둔해서 그랬겠지만 나는 그런 것을 보면서도 전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는 현지 공장을 비롯하여 국내외로 열심히 쏘다녔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무렵 이미 돌아오실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고 덧붙였다.

이맹희는 자신이 삼성을 떠나게 된 깊은 내막을 공개했다. 그는 "더욱이 창희 사건의 여파도 아버지와 나 사이에 내부적으로 보이지 않은 금을 만들었다. 아버지는 함께 출근하고 함께 퇴근하더라도 나에게 늘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풍기곤 했다. 실제 여러 가지 면에서 나에게 내용을 말하지 않은 면들이 있기는 했는데 나는 그 당시에 그런 일들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서 "정상권력이 갖는 속성은 얼음장처럼 차디차다는 것이다. 그것은 냉혹하다. 누구든 정상의 위치, 거대한 조직을 끌고 갈 책임을 지면 냉혹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절대 권력은 속성상 그 정상의 위치에는 단 사람밖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와 갈라서기 그렇게 시작

이맹희는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직함을 빼앗아 간 과정을 상세하게 털어 놓았다. 그는 "주변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지면서도 그 실체에 대해서 긴가민가하고 있는데 1973년 여름이 되었다. 아버지 방에 에어컨을 틀어 두었던 기억이 나니 한여름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나를 부르더니 나에게 '네 지금 직함을 몇 개나 가지고 있노?'라고 물었다. 내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열댓 개 되는 것 같다고 했더니 '네가 다 할 수 있나?'라고 되물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밝질 않았다. 그 이전부터 뭔가 낌새를 채고 있었기에 '다 할 수는 없심느더'라고 했더니 '그라모 할 수 있는 것만 해라'라고 말을 잘랐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났다. 이번엔 아버지가 '내가 한 번 보게 직함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종이에 써 와 보라'고 했다. 이진석 비서실장을 시켜서 내 직함을 써오니 전부 17개였다"고 전하면서 "삼성전자, 중앙일보, 삼성물산, 제일제당, 신세계, 동방생명, 안국화재, 제일모직, 성균관대, 삼성문화재단 등 모두 부사장, 전무, 상무, 이사의 직책으로 17개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나 역시 내 직함이 이렇게 많은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헤어짐의 시작이었다. 아버지와 내가 갈라서는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비탄 어런 감정을 쏟아냈다.

이맹희의 다음과 같은 회고는 이맹희의 삼성과의 결별내막을 담은 핵심 내용인 것 같다.

"말투는 의논조로 이건 하기 힘들제' '이건 너 할 수 없제!'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이미 예정을 하고 있었던 듯 연필로 직함들에 줄을 죽죽 그었다. 대부분을 그렇게 줄을 긋고 나에게는 삼성물산, 삼성전자, 제일제당의 부사장 직함 3개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삼성의 운영에 상당한 실권이 있었던 삼성문화재단의 상무이사 자리와 안양 골프장 운영위원 등 한두 개의 자리는 더 남겨져 있었던 듯하다. 나는 그제서야 사태를 깨달았다. '아, 아버지가 나보고 물러나라고 하시는구나.' 사람들은 부자지간에 '이젠 내가 할 테니 너는 당분간 쉬어라'라고 이야기하면 될 것을 왜 그리 복잡하게 일을 진행하는지 궁금해할 수도 있다."

이맹희, 삼성과 이별 마지막 장면

이건희를 삼성의 후계자로 옹립하기 위해 이건희 장인이었던 홍진기 등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설들이 있었지만 이맹희는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다. 그가 아버지와 헤어지고, 삼성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은 삼성이라는 재벌 총수자리를 놓고 부자지간이 어떻게 대응했고, 어떻게 결별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아버지를 모시고 일찍 출근했다. 나도 회사는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만 나갔다. 6개월을 그렇게 보냈다. 별로 할 일도 없고 아버지가 전면에서 일을 하는데 내가 끼어들어 이런저런 말을 보태는 것도 우스웠다. 무료하던 차에 어느 날 김재명을 만나서 일본에 가서 당분간 쉬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나마 아버지한테 자유롭게 의사를 전하던 김재명이 이버지에게 내 뜻을 전하고 대답을 들어왔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하다니….' 김재명에게 대신 전한 아버지의 응답이었다. 그 길로 짐을 싸서 3일 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후계구도 바꾼 모반사건 전모

이맹희는 "1970년에 접어들면서 내가 알게 된 사건이 바로 창희가 아버지에 대해서 모반을 한 일이었다. 내가 그 일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그 후에 알게 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어쨌든 이 사건은 이른바 삼성은 후계구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제 창희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당시 창희는 자식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창희를 포함해서 모두 다섯 명이서 꾸민 이 일은 창희가 아버지를 사직 당국에서 조사하라는 천륜에 어긋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를 만들어서 그것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내민 것"이라고 설명하고 "삼성 이병철 사장이 이런 잘못이 있으니 기업에서 영원히 은퇴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탄원서 같은 것이었는데 창희를 제외한 네 명 중 한 명을 제외하고 세 명이서 창희를 부추겨서 그런 짓을 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고 공개했다.

이맹희는 "나중에 들으니 이 문서를 청와대에서 제일 먼저 손에 넣은 사람은 전두환 중령이었고 이걸 박종규 실장에게 보여준 다음 바로 박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고 한다. 박종규 실장의 전언에 따르면 당시 박 대통령은 이 문서를 살펴보곤 다른 것은 문제를 삼지 않고 해외도피 재산 문제는 알아보고 조치를 취하라고 했다고 한다"면서 "처음에는 아버지가 나도 이 일에 대해서 개입이 된 것으로 생각을 했던 듯하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그 일에는 절대 개입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다, 그 일에 개입된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 있는데 내가 어찌 거짓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진실을 전하고 있다.

후계자 되지 못한 가슴 아픈 고백

이 사건 속에는 이맹희가 이병철 회장의 장남으로서 삼성그룹의 총수 자리를 물려받지 못한 가슴 아픔이 담겨져 있다.

이 사건의 주모(?)자였던 이창희의 마지막 발버둥도 자세히 적었다. 이맹희는 "창희는 자신도 삼성을 살리려고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창희는 '미국으로 출국하라'고 한 아버지의 명령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발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하고 "내가 뭘 잘못했다고 미국으로 갑니까? 나는 삼성을 살리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고 말한 부분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삼성 후계구도에 대한 증언

이맹희의 삼성 후계구도에 대한 증언은 당시로 봐서는 한국 재계의 지형을 바꾸는 대사건이었다. 이맹희는 "아버지가 삼성의 차기 경영자로 건희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처음 발표한 것은 1976년 9월 중순경이었다. 이때 아버지는 암수술을 위해서 일본으로 출국하기 직전이었다"고 되돌아보면서 "아버지가 삼성의 후계구도에 대해서 처음으로 밝힌 것은 암수술차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날 밤의 가족회의에서였다. 아버지의 병이 암이라고 확인된 후, 일본의 가지타니 박사의 집도를 받으러 가기 전날 밤 전 가족이 한자리에 다 모였다. 건희는 해외출장 중이었다. 장소는 용인에 있는 아버지의 거처에서였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후계구도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했다.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 가도록 하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회사의 대권이 동생한테 넘어가는 순간인데 충격을 받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이맹희는 "어머니와 누이들 그리고 아내까지 있던 자리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의 충격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무렵엔 벌써 아버지와의 사이에 상당한 틈새가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언젠가는 나에게 삼성의 대권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면서 "아내와 어머니도 멍한 표정이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이맹희는 "운명 전에 아버지는 인희 누나, 누이동생 명희, 동생 건희 그리고 내 아들 재현이 등 다섯 명을 모아두고 그 자리에서 구두로 유언을 하고 건희에게 정식으로 삼성의 경영권을 물려주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병철 삼성의 창업회장은 운명하기 직전에도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의 대권을 물려준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건희 성공 뒤에 이맹희 희생 숨어

큰 나무 밑에서는 큰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큰 나무가 햇볕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인 밑에서는 큰 인간이 나올 수 있다. 이맹희는 오늘날 한국의 최대그룹인 삼성의 이병철 창업회장의 큰아들이다. 그의 인간 됨됨이는 간혹 언론을 통해 공개됐으나 구체적인 그의 생각을 읽어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이맹희는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지만 아버지가 평생 가슴에 간직한 산업보국과 인재양성이라는 두 단어를 가슴에 안고 나도 살아간다. 기업을 운영하든 않든 간에 이 말은 내 평생 못 잊을 말이기 때문이다. 좋은 인재를 가려 뽑아 잘 기르면 그 인재가 바로 어디에 내 놓아도 뒤지지 않는 기술을 개발한다. 기술 개발은 곧 생산 증대와 수출 증대로 이어진다. 이게 바로 우리 경제와 우리나라가 가야 할 길"이라고 강조하면서 "좁은 땅덩어리, 가난한 나라에서 이 땅의 경제인들은 참으로 고생을 했고 앞으로도 고생을 할 터이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의 살길이기에 멈출 수 없으리라"고 격려하고 있다. 한국 최대 기업을 일으켜 세운 아버지 곁에서 기업경영을 직접 배운 경영자다운 발언이다.

이맹희, 이건희 회장 전적 신뢰

이맹희는 오늘날 삼성그룹의 최고경영자인 이건희 회장을 위해 남모를 고민을 했던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친동생인 이건희 회장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야기이다.

이맹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1987년) 후 나는 외국으로 길을 떠났다. 내가 길을 떠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동생 건희가 정식으로 삼성의 총수가 된 마당에 그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시 조금이라도 건희가 나를 부담스러워하면 그것이 바로 삼성의 경영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외국에서 영원히 살면서 귀국하지 않을 생각을 했었다. 그동안의 떠돌이 생활이 아버지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면 그때의 길은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나는 내 자취를 숨기고 싶었다."면서 "소문이라는 것은 늘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 특히 그 소문이 얼토당토않은 것일 때는 해명을 할 수도 없고 참으로 당황스럽다. 당시로서는 내가 만약 국내에 머물고 있으면 더 흉흉한 소문이 나돌 것 같았다. 어쨌든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삼성에 좋을 것 같았다"고 숨겨진 사실을 외부에 알렸다.

이맹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출국해서 5년여 동안 아프리카, 남미, 미국, 일본 등 여러 나라를 다녔다. 가급적이면 한국은 잊고 살아가려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여러 나라를 다니며 노력했지만 내가 얻은 결론은 단 하나, 역시 사람은 조국을 떠나 딴 나라에 영주하기란 어렵다는 것이었다. 미국에 집을 하나 장만해서 장기 체류할 생각도 해봤지만 그 역시 6개월 이상 머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음식 적응과 현지문화 적응에 서툰 것은 아닌데도 한껏 버틸 수 있는 기간이 6개월이었다"고 내면의 아픔이 있었음을 토로하면서 "동생 건희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그저 남의 이야기를 좋아해서 내가 동생을 미워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결코 그렇지 않다. 다만 내가 건희가 삼성을 운영하는 방식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불만을 느끼고 있다고 표현한다면 그 말은 맞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더 잘해 주었으면 하는 정도이지 건희가 어떤 잘못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도 건희 체제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못 박듯이 말했다.

친동생인 이건희 회장 체제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외부로 거침없이 공표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그룹과 동생을 위한 대양보가 담긴, 일종의 지지선언인 셈이다. 자신을 스스로 해외로 도피시킨 도피행각은 숭고한 자기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었을 것. 이는 삼성그룹의 최고경영자인 동생 이건희 회장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고, 이 같은 행동은 삼성 발전의 밑거름이 됐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때였지만 치열한 삶 살았다"

이맹희는 이제 지병으로 투병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삶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하늘만 알겠으나, 그는 이병철의 큰아들로 태어나 한때 삼성을 위해 봉사한 최고경영자 중의 한 명이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성공과 삼성그룹의 쉬지 않는 발전 이면에는 그의 형인 이맹희의 밀알같이 썩어져 새싹을 틔워준 자기희생도 곁들여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이맹희가 회고록에 기술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는 더 이상의 욕심은 없다. 억울한 일도 겪었고 참으로 내가 생각해도 안타까운 순간은 있었다. 그러나 한때였지만 나는 참으로 치열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한다. 모든 주변의 도움 때문에 가능했다고 믿고 있다"라는 대목을, 이 글의 끝에 배치한다. 그리고 이맹희는 아버지를 향해 “거인(巨人)이었다”고 평했지만, 필자는 이맹희를 향해 “대인(大人)이었다“고 평하고 싶다. moonilsuk@korea.com.

*필자/문일석. 시인. 본지 발행인.

출처;브레이크뉴스
2012년02월16일 09:48: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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