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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관료의 영혼을 저당 잡은 권력
인사권 거칠게 휘두르는 권력 앞에 공무원은 영혼 없는 관료로 전락 문제는 권력 주변 인물이 아니라 눈과 귀를 닫은 최고 권력자뿐

조선일보 박종세 부국장 겸 여론독자부장
입력 2020.02.21 03:16



박종세 부국장 겸 여론독자부장
선출된 정치권력 앞에서 임명직 공무원들은 무력하다. 비단 현 정부뿐만 아니라 보수·진보를 망라한 과
거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거칠게 권력을 휘두르면 관료들은 바람보다 빨리 몸
을 숙여 영혼 없는 충실한 테크노크라트로 전락했다. 인사권자의 입맛에 맞춰 같은 사안을 순식간에 A
답안지에서 정반대의 B 답안지로 바꿔 그럴듯한 보고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최근 검찰 인사에서 보
듯 최고 권력자는 맘에 안 드는 인물을 쳐낼 수 있고, 그걸 본 공무원 사회는 납작 엎드려 결국 순치되
고 만다.

한때 우리 사회에는 경제를 정치의 입김으로부터 차단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 같은 것이 있었다. 사유
재산권과 거래의 자유, 기업 활동과 이익 추구가 법의 보호 아래 작동하도록 정치권력의 이해와 침해에
서 독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경제 관료는 이런 경제 원칙을 확인하고 실천하는 국민의
대리인 역할을 하도록 기대되어 왔다. 그러나 경제 관료의 말은 언제부터인가 힘을 잃고 있다. 우리 사
회가 쌓아 올린 번영의 철학과 원칙을 대변하지 못하고 종종 자의적 권력에 맞춰 조변석개하는 비루한
언어로 전락했다. 가령 9개월 전 홍남기 부총리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국가 채무 비율을 40% 선으
로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가 "40%의 근거가 뭐냐"는 문재인 대통령의 반박을 듣자 일주일 뒤 "내년에
는 40%를 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말을 바꿨다. 불과 6개월 전 신재민 전 사무관이 국가 채무 비율이
높아지는 것을 사실상 별일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기재부가 적자 국채 발행을 계획했다는 목숨을
건 폭로는 권력자의 한마디로 아무 값어치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경제가 정치에서 독립하는 것은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경제 원칙과 시장경제의 작
동을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지키려는 충만한 권력의 의지가 맹렬하게 작동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경제가 처음으로 정치보다 우위를 점했을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이
었다. 피를 부른 잔혹한 군사독재 정권이었다는 데 이견이 없고 여기에 대한 역사적 심판도 끝났지만,
이와 별개로 이 시기에 어떻게 시장경제가 한국에 뿌리를 내렸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시 정당성이
없었던 정권은 필사적으로 경제에 매달렸고 다른 정치권력의 시장 간섭을 최고 권력이 막아냈다는 평
가를 받는다. 당시 김재익 전 경제수석에게 전두환 전 대통령이 했던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은 권력 이양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려는 강한 권력 의지의 표현이다. 그 이후 우리 경제가
정치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했던 시기는 외환 위기 직후 달러가 부족해 국제기구 눈치를 봐야 했던 기간
정도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제는 정치 과정이었다. 사유재산권도 수많은 행동 규범과 법 제정, 집행이라는 정치
적 과정을 통해서 오늘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경제학자 아바 러너는 "경제학이 (우아하게) 사회과학의
여왕 자리에 오른 것은 정치적으로 해결된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최고 권력자의 철학이라고 봐야 한다. 소득 주도 성장과 탈원전 정책이 무수한
비판을 받아도 수정이 없는 것은 대통령 생각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이 귀를 기울이지 않으
면 합리적 경제 조언과 각론적 처방은 그냥 땅에 떨어지고 말 뿐이다. 노동 개혁과 규제 혁파가 한국 경
제의 돌파구라고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은 철저히 정치의 영역이다. 경제가 살려면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최소한 주군의 눈과 귀를 가리는 주변 인물들이 문제라는 얘기는 말아야 한다.
크게 보면 그저 눈과 귀를 닫은 주군이 있을 뿐이다.


출처 : 조선닷컴
2020년02월21일 10:45:5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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