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抗命의 역사… 권력은 無常하고 고통은 길다
“권력의 業報에 전율… 하늘의 그물은 惡人을 놓치는 법 없어”(심재륜 前 고검장)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1969년 4·8 항명… 권오병 문교장관 해임, 朴統 분노로 與의원 5명 제명
⊙ 1971년 10·2 항명…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 김성곤 의원 정계 은퇴
⊙ 1973년 윤필용 권력 스캔들, “후임은 이후락” 발언으로 구속
⊙ 1979년 10·26 항명 살인… 中情부장 김재규 손에 朴正熙 18년 집권 종말
⊙ 1980년 5共 ‘로열패밀리’(이철희·장영자) 수사로 실세 허화평·허삼수 쫓겨나
⊙ 1999년 심재륜 항명, “검찰을 정치권력 시녀로 만든 당신!”

지난 1월 9일 밤 대검찰청 앞 모습이다. 사진에 보이는 청동조형물은 정의·질서·평화를 상징하는 삼각뿔
형태의 세 기본형을 모체로 하여 정의사회 구현 의지와 국법 질서 확립의 의연하고 진취적인 기상을 표
현한 것이다.
작년 6월 조은석(사법연수원 19기) 법무연수원장(고검장)이 퇴임을 앞두고 법무연수원 보조 교육자료
인 《수사 감각》을 펴냈다. 이 책에 놀랍게도 ‘항명(抗命)’이 언급돼 있다. 이런 문장이 나온다.

〈…항명은 타당하면 받아들인다. 그러나 항명한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권력의 속성으로 볼 때 항명한 자는 기필코 보복을 당한다는 얘기였다. 어떻게? 권력자는 인사로 보복
한다. 이런 문장도 있다.

〈…전쟁에서 장수는 왕의 잘못된 명령을 들으면 전투에서 죽고, 왕의 잘못된 명령을 따르지 않고 싸
우면 승리한 후 역린(逆鱗)을 건드린 죄로 결국 죽는다. 왕은 전쟁의 패배는 용서해도 자신의 권위를 건
드리는 것은 용서치 않는다.…〉

조 전 고검장은 ‘수사도 마찬가지’라고 책에 썼다. 끝까지 권력자의 뜻에 거역하면 결국 인사권에 의한
보복을 당한다. 인사 보복에는 청와대(대통령)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 법무부를 통해서 한다. 법무부에
서 이견이 있는 것처럼 한다. 그러나 일선(검찰)은 다 안다. 그 배경조차 다 안다.



지금 청와대와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윤석열 검찰총장의 행동을 항명으로 받아들인다. 이미 인사 보
복으로 ‘윤석열 사단’을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해체시켜버렸다. 청와대를 향한 검찰의 수사를 봉쇄하
기 위해서다.

지난 1월 8일 검찰총장 휘하 검찰 간부를 모조리 좌천시킨 데 이어 9일 윤 총장에 대한 징계 검토 지
시, 10일 검찰 직접 수사 조직 축소, 특별수사팀 구성 차단 조치 등 ‘4중 잠금장치’를 밀어붙였다.

해방 후 대한민국 검찰은 대통령의 인사권을 통해 많은 굴곡이 있었다. 굴곡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원칙이 하나 있다. 인사권자는 자신을 거스른 이를 결코 용서・용납하지 않는다. 한 번 눈감으면
뒤이
어 거스르는 자가 나오기 때문이다. 아량은 권력의 속성이 아니다. 역대 정권의 속성에 비춰볼 때 권력
은 칼로 완성되지 아량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1969년 4·8 항명


1969년 9월 14일 3선 개헌을 반대한 정구영(뒷줄 왼쪽)·예춘호·서민호(아랫줄 왼쪽). 양순직 의원이 얘
기를 나누고 있다.
기자는 대한민국 항명의 역사를 되짚어보았다. 항명 중에서도 대통령 인사권과 관련한 항명으로 범위
를 좁혔다. 또 직접적인 항명은 아니나 권력자에 의해 항명으로 비친 사건도 들여다보았다. 다만 박정
희(朴正熙)의 항명인 5·16쿠데타, 전두환(全斗煥)의 항명인 12·12쿠데타는 제외한다. 이른바 ‘항명 살
인’인 10·26은 짧게만 언급한다.

우선 1969년 4·8 항명이 떠오른다. 이 항명을 이해하려면 당시 정치 상황을 알아야 한다. 그해 정가(政
街)는 연초부터 개헌(改憲)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3공화국 헌법상 대통령은 재선(再選)까지만 허용
이 됐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을 한 번 더 하기 위해서는 개헌이 필요했다. 야당은 말할 것도 없이
개헌에 반대했고, 공화당은 개헌파와 반대파로 양분되었다.

공화당 내 양분 사태는 끝내 항명 사건으로 이어졌다. 1969년 4월 8일 야당인 신민당에서 제출한 권오
병(權五炳) 당시 문교부 장관 해임 건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국회 사학(私學)특감
때 수감 태도가 불순해 야당의 반발을 샀고,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 의원을 향해 폭언한 것이 빌미가 됐
다.

해임안 표결 결과 총 투표수 152표 중 가(可) 89표, 부(否) 57표, 무효 3표, 기권 3표로 가결되고 말았
다. 해임안 표결에 여당인 공화당 의원 40여 명이 당명을 어기고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당시 헌법에는
‘해임 건의가 있을 때에는 대통령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하여야 한다’고 돼 있어 권 장관은 해
임됐다.

해임안이 처리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당의 지도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반당 행위”라며 숙당(肅
黨)을 지시했다. 박 대통령은 “내가 당 총재직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당의 확고한 지도 체제를 확립하
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면서 “당은 일주일 이내에 이번 사건을 주동한 반당분자를 철저히 규
명하고, 그들이 몇십 명이 되더라도 가차 없이 처단하라”고 했다.

결국 4월 14일 당명에 불복한 주동자급 의원인 양순직(楊淳稙)·예춘호(芮春浩)·정태성(鄭泰成)·박종태
(朴鍾泰)·김달수(金達洙) 등 5명을 당기위원회 결의와 의원총회 인준을 거쳐 제명했다. 공화당 재경위
원장이던 양순직 의원과 상공위원장이던 예춘호 의원은 위원장직도 함께 내놔야 했다.

예춘호는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이후락(李厚洛·1924~2009) 중앙정보부장이 나보고 ‘예춘호, 너 사람이 달라졌다. 각하께서 너만은
결코 그럴 리가 없다고 아쉬워하고 계신데 그러지 마라’고 했어요. 내가 찬성표를 던진 것은 사실입니
다. 그러나 상공위원장으로서 상공위원들에게 권유한 일은 없습니다.”

제명된 5명은 국회의원 휴게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당시 예춘호 의원은 “권 문교 해임건의안 표결
때 항명한 것은 후회하지 않지만, 창당에 참여한 내가 당을 떠나는 것은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이들이 기자회견을 하는 내내 김성곤(金成坤·1913~1975) 의원이 자리를 같이했다. 기자회견을 마치
고 일어서자 김 의원은 제명된 5명의 손을 일일이 잡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또 기회가 있겠지요!”

항명 파동 후 3선 개헌은 5개월 후인 그해 9월 14일 국회 제3별관에서 변칙 처리됐다.


金成坤과 1971년 10·2 항명


1960년대 후반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고 있던 성곡 김성곤 의원(콧수염 난 이)이 박정희 대통령 등 뒤
에서 허리를 숙여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두 사람 사이로 이후락 비서실장이 보인다. 사진제공=성
곡언론문화재단
예춘호 등 동료 의원 5명의 제명을 지켜보았던 김성곤 의원도 결국 항명 사건을 일으키고 만다. 이른
바 1971년 10·2 항명 파동을 말한다. 이 일로 김성곤은 정계를 떠났고 다시는 국회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이 항명의 전말은 《월간조선》 1995년 4월호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1971년 7월 3일 박정희가 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을 계기로 당정(黨政)은 연석회의를 통해 서정(庶
政) 쇄신운동 원칙을 확인했다. 그러나 당과 정부 사이에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각한 냉전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해 제7대 4·27대선과 제8대 5·25총선이 끝난 뒤 오치성(吳致成·1926~2017) 내무부 장관은 취임 직
후인 6월 11일 경북지사 김덕엽 등 8명의 지사를 면직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치안국의 과장급을 포함한
경찰 간부 이동을 단행했다. 또 시장·군수 등 200여 명의 자리를 옮겼다.

이 내무부 인사는 예상을 뛰어넘는 광범한 것이어서 놀라움과 동시에 심한 반발을 샀다. 지사, 경찰국
장 등 지방 고위 공무원 인사는 여당 지도부의 긴밀한 협조로 이루어지는 것이 그간의 관례였다. 대개
공화당의 ‘4인 체제’(金成坤·白南檍·金振晩·吉在號)의 의사를 정부가 반영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오치성의 이런 인사 배경에는 박 대통령의 심중(心中)이 담겨 있었다. 박 대통령은 개헌과 선거
를 통해 당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커졌고 그 힘이 국회를 통해 발휘될 때 자칫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발
전할 수도 있다는 불안을 지울 수 없었다. 여당을 실질적으로 지도해온 4인 체제의 영향력을 더는 키울
수는 없다는 강박관념이 박 대통령을 짓누르고 있었다. 따라서 당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첫 대상이
5·25총선을 주무른 경찰을 비롯한 내무공무원이라고 판단해 광범한 이동을 단행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성곤 위원장(당시 공화당 재정위원장)은 자기와 한마디 상의 없이 경북지사를 면직시키지
않나, 경찰국장을 바꾸지 않나, 관례를 무시한 오치성 장관의 인사에 울화통이 치밀었다.


中情의 김성곤 연행은 명백한 헌법 위반 사태

그 무렵 공화당 지도부는 박정희 이후 체제를 고심하고 있었다. 앞으로 4년 임기를 마친 박정희의 후
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회를 중심으로 공화당이 대선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나름의 논리가
4인 체제에게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9월 정기국회가 열렸다. 물론 해임안은 야당인 신민당이 냈다. 해임안에 대한 신민당의
당론이 최종적으로 정해진 것은 9월 28일 저녁. 김성곤·길재호 등이 “3부 장관 중 오치성 해임안은 가결
의 원칙”을 정하고 사발통문을 돌렸다.

오치성 해임안이 통과되자 김성곤조차 새삼 놀랐다. 예상했던 것보다 동조표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여당의 반란표가 32~34표였다.

그러나 이 사태는 대통령과 의회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재정립하게 만들었다. 중정(中情)과 군부, 그리
고 관료 체제로 무장한 대통령 권력의 축에 국회가 대항을 시도한 정면 도전이었다.

오치성 해임안이 처리된 그날 저녁 김성곤 집으로 누군가가 찾아왔다. 사복 청년이 넙죽 절을 하더니
한발 앞으로 나왔다. “부장님(이후락)께서 좀 뵙자고 해서 모시러 왔습니다.”

중정 지하의 좁은 골방에 도착한 김성곤은 조사관들과 마주 앉았다. 얼굴에 잔뜩 독기를 품은 젊은 조
사관들은 그가 통풍으로 고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정강이를 지그시 누르는 것도, 김성
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신체적 고통이었다고 한다. 김성곤은 이렇게 말했다.

“오치성 해임안에 대한 것이라면, 모든 책임은 내게 있소. 조사야 하나 마나 당신들이 더 잘 알고, 또
국회의원의 소신으로 한 것을 어떻게 조사하겠소?”

그러나 중정이 김성곤 의원을 연행해 원내의 표결 행위를 조사했다는 것은 명백한 헌법 위반 사태였
다. 헌법 42조는 ‘의원이 국회 안에서 한 발언이나 표결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면책특권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1995년 《월간조선》 4월호에 실린 ‘대정객(大政客) 김성곤, 박정희에
항명하다!’ 기사 중 일부다.

〈…김성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는 동안 중정부장 이후락은 자주 박정희에게 중간보고를 했다. 아무
런 저항도 없이 조사에 응할 뿐 아니라 모든 책임을 지는 뜻에서 의원직과 당적을 버릴 것을 선언했다
는 보고를 듣고 박정희는 잠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김성곤답구먼….” 들릴까 말까 한 낮은 목소리를 듣고 이후락은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조치하겠습니
다”라고 대답했다. 김성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보고를 받은 이후락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는 중앙
정보부 표시가 없는 편지지를 꺼냈다.

‘김성곤 의장 귀하.

다 같은 충성심에서이지만, 견해차에 의한 방법은 엄청난 결과를 빚고 말았습니다.

정치의 무상을 절감하며, 우정의 상처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가슴 아픕니다. 10여 년의 인간적 우의
에는 변함없을 것을 다짐하면서 우선 총총, 심경의 일단을 전합니다.

자중자애하시어 건강하시길 빕니다. 10월 5일 弟 이후락 拜

각하께서도 배신으로는 오해하시지 않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후 김성곤은 정계를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돌아올 수 없었다. 대신 1973년 대한상공회
의소 제8대 회장에 취임하며 재기했다. 그는 1975년 2월 24일 고려대 교우회장 자격으로 졸업식 축사를
준비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결국 사망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박 대통령은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尹必鏞 사건… 항명 아닌 항명


1973년 4월 군사법정에서 前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앞줄 오른쪽)이 8개 죄목으로 기속되어 징역
형을 언도받고 있다. 윤 소장은 재판 중 고개를 떨구었다.
권력 스캔들 ‘윤필용(尹必鏞·1927~ 2010) 사건’은 박정희에 대한 직접 항명은 아니지만 대통령에게 항
명으로 비친 사건으로 한국 정치사에 기록돼 있다. 박정희는 권력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고, 장기 독재
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던 시절이었다.

1973년 4월 어느 날, 서울 한남동 술집에서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박 대통령이 건강이 안 좋으니
대비를 해야 된다. 후임은 이후락”이라고 한 이야기가 발단이 되었다. 이 자리에 동석한 ‘하나회’ 장교
여러 명이 그 말을 듣고 박종규(朴鐘圭·1930~1985) 대통령 경호실장에게 알렸고, 그는 박 대통령에게
윤 장군의 발언을 보고했다.

그 무렵 박 대통령은 목욕을 하고 나오다 넘어져 갈비뼈를 다쳐 심신이 좋지 않을 때였다. 박 대통령
은 “후임은 이후락” 건에 대해 즉시 알아보라고 했는데 박 실장이 깜빡 잊어버렸다. 어느 날 박 대통령
이 알아봤느냐고 물었다. 박 실장은 “윤 장군이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알아보지 않았다”고 말
했다. 그러자 재차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그 후 박 실장이 윤 사령관을 청와대로 불렀다. 두 사람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박 실장은 “대통령
의 경호실장으로서 묻는 것”이라며 한남동 건에 대해 추궁했고, 윤필용은 박 실장의 평소와 다른 돌변
한 표정을 보고 ‘나를 제거할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윤필용은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 나는 그런
이야기한 적이 없다. 할 테면 해봐”라고 고함친 뒤 나와버렸다.

박 실장은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이 군을 비상소집해 청와대로 쳐들어올 수 있다”는 최악의 상황까
지 포함해 바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은 유재흥(劉載興) 국방장관에게 윤필용 해임을 구두지시
했다. 얼마 후 윤 장군은 체포되었다.

당시 육군 보안사령관은 윤 장군과 육사 8기 동기인 강창성(姜昌成) 장군이었는데, 박 대통령이 철저
히 조사하라고 직접 지시했다. 조사 결과, 특별한 사항은 없었고 쿠데타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다. 그러
나 별건 수사로 업무상 횡령,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군무이탈 등 8개 죄목을 걸어 징역 3년형과 추
징금 약 80만원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윤필용 개인의 처벌에 머무르지 않았다.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 준장을 포함, 장성 3명과 장
교 10명에게 징역형이 내려졌다. 또 그와 가까운 장교 30여 명이 무더기로 군복을 벗었다.

세월이 흘러 2015년 11월 9일 윤필용 사후(死後) 그의 아들(윤해관)이 재심을 청구했다. 대법원(주심
조희대 대법관)은 윤필용에게 내려진 원심을 파기하고, 형을 선고하지 않은 채 판결을 확정했다.


1979년 12월 4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법정에 선 김재규. 권력 2인자였던 그는 항명 살인을 저
질렀다.
한편, 항명과 권력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던 박정희 대통령은 끝내 ‘항명 살인’으로 김재규(金載圭
·1926~1980) 중정부장의 총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놀라운 경제 업적에 비해 18년 장기 집권의 말로
는 역대 어느 권력자보다 비참했다. 그토록 후계자 문제에 민감했던 그가 최측근에 의한 항명 살인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김재규는 김녕(金寧) 김씨다.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불만을 품고 친(親)단종 쿠데타를 모의하다가 발각
되어 죽은 충신 김문기(金文起)의 18대손이다.


5共 핵심에서 쫓겨난 許和平·許三守의 경우


1979년 ‘12·12’를 승리로 이끈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5명의 보안사 핵심참모들. 왼쪽부터 이학봉 수
사국장,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 장도영 보안처장, 전두환 사령관, 권정달 정보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전두환 정권 당시 5공(共) 권부(權府)의 핵심으로 꼽힌 허화평(許和平), 허삼수(許三守)도 항명으로
비쳐 오랜 유랑 생활을 해야 했다.

5공 최대의 사기 사건인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있던 1982년 5월로 돌아가자. 당시 사채시장의 ‘큰손’
장영자는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李圭光) 광업진흥공사 사장의 처제였다. 이들 부부는 자금
난을 겪는 건설업체에 유리한 조건으로 자금을 제공하고 대여액의 2~9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사채시
장에 유통시키고 뒷돈을 챙겼다. 어음을 발행한 기업이 부도로 무너지면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이에 대해 허화평 전 의원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철희·장영자 사건 당시엔 대통령과 충돌이나 상충은 없었습니다. 나중 후폭풍이 복잡해서 그렇지,
처리 과정에서 문제는 없었어요. ‘구속이 불가피하다’고 보고하니, ‘그래 구속해야지’ 그러셨어요. ‘처삼
촌인데 고려해야지’ 하는 얘기는 그때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재발되지 않게 (사건 처리를) 세게 밀기는 밀었습니다. 대통령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
했죠. 나중 세월이 흘러 이야기를 들어보니 집안에서 불편해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1982년 12월 청와대 정무수석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5공이 끝날 때까지 돌
아올 수 없었다. 1988년 귀국해 민정당 입당을 타진했으나 입당은커녕 무소속 출마조차 막혔다. 허화평
전 의원은 “내가 (5공과)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혼자 힘으로 의회정치에 투신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받
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결국 또 5년을 기다려야 했고 1992년 5월 무소속으로 고향인 경북 포항에 출마해 당선됐다.

3허(許)씨 중의 한 명인 허삼수도 다르지 않았다. 5공 초기 청와대 사정수석 재임 기간은 3년이 채 안
된다. 그러나 이철희·장영자 사건 처리를 주도하다 결국 하와이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곳에서 5년간 낭
인(浪人)으로 지내야 했고, 5공이 끝날 무렵인 1987년 민정당에 입당했지만, 금배지를 단 것은 1992년
14대 국회 때였다.

허화평·허삼수는, 항명은 아닐지라도 전두환 ‘로열패밀리’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긴 유랑 생활을 감내
해야 했다. 어쨌거나 둘을 내쳤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후 반란 수괴죄 및 살인, 뇌물 수수 등으로 1심
사형, 2심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나중에 사면됐다.

그러나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고(故) 조비오 신부의 증언을 비난한 것과 관련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지금까지 고통스럽게 재판을 받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서울시는 지방세 9억8000여만원을 체납한
전 전 대통령의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을 수색해 냉장고와 TV 등 일부 재산을 압류했다. 검찰은 추징금
환수를 위해 그의 집을 공매에 부쳤고, 5회 유찰 끝에 51억3700만원에 타인 명의로 넘어갔다.


沈在淪의 항명과 《老子》의 구절


대검 중수부장 시절의 심재륜 검사. 1997년 3월 24일 기자간담회에서 “주춤거리지 않고 조건 달지 않는
수사로 실추된 검찰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1999년 초 대전 법조비리 사건 당시 검찰총장과 수뇌부를 ‘정치검사’로 몰아 동반 퇴진을 요구한 검찰
사상 초유의 항명 파동이 있었다. 이른바 심재륜(沈在淪·사시 7회) 파동. 그는 ‘면직(免職) 1호 검사’로
검찰사에 기록됐다.

대전 법조비리 사건 당시 그는 한 변호사에게 소액 사건을 소개해주고 전별금으로 현금 100만원과, 열
번에 걸쳐 한 번에 100만원씩 모두 1000만원어치 향응을 받은 혐의를 받았다. 심재륜 당시 대구고검장
은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압력을 견딜 수 없자, ‘국민 앞에 사죄하며’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
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항명 파동으로 발전했다. “검찰을 정치권력의 시녀로 만든 당사자들이 자
신들의 치부를 숨긴 채 후배 검사들의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다”며 수뇌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 것이
다.

그리고 법무부 장관이 주재하는 징계위원회의를 거쳐 대통령의 이름으로 면직 처분된다.

당시 징계는 ▲대구고검장이 서울 대검 기자실로 올라와서 성명서를 발표했으니 근무지를 이탈했다 ▲
검찰총장이 대질심문 받으라는데 안 받았다 ▲검찰의 체면을 손상시켰다 ▲증거를 인멸하려고 남기춘
검사를 보내서 은폐 시도를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면직 처분 무효소송을 냈고, 1심과 2심에서 차례로 면직 취소와 복직 판결을 받아낸 데 이어
2001년 8월 24일 대법원이 징계가 위법 부당하다고 확정판결했다.


“검찰은 巨惡을 응징해야”

심재륜을 면직시킨 검찰 수뇌부는 어떻게 됐을까. 모두 정기 인사에서 옷을 벗었다. 그를 몰아낸 김태
정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으로 승진하는가 싶었는데 옷 로비와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으로 구속됐
다.

이에 대해 심재륜 전 고검장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업보에 대해 전율을 느꼈습니다. 《노자(老子)》에는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하늘의
그물은 성긴듯 보이지만 결코 악인을 놓치지 않는다)이라는 구절이 나오지 않습니까.”

2001년 10월 22일 그는 부산 고검장에 복직하며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말했다.

“밖에서의 시절은 검찰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주기도 했습니다.

검찰은 힘없고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에게는 까다롭게 절차를 따지고 엄격히 법 적용을 하면서 군림하
고 지배하는 존재로, 반대로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친절하여 거악(巨惡)을 응징하려는
자세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검찰의 참담한 현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새 출발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건을
보잘것없는 사건으로 무시하지 말고 정성을 다해 실체를 규명하고, 옳고 그름을 가려줘야 합니다. 작은
사건에서 ‘작은 정의’를 실현하면 그 노력이 모여 ‘큰 정의’가 실현되고, 우리는 마침내 ‘국민의 검찰’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복직 취임사는 이 시대에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어쩌면 윤석열 검찰총장은 이 취임사를 소리 내
어 읽었을지 모르겠다. 또 심재륜 전 고검장은 최근 청와대를 향한 검찰수사와 윤 총장의 ‘항명’을 보며
고개를 끄덕일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조은석 전 고검장이 쓴 《수사 감각》에 나오는 글을 소개한다. 문재인의 청와대와 추미애
의 법무부에 뼈와 살이 되는 충고가 아닐 수 없다.

〈…권력과 관련된 사건에 대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수사를 개시하고 전개한 결과, 검찰이 위기에 처하
는 것을 떠나 사회적 갈등을 더욱 증폭시킨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순간을 모면하기 위하여, 특정 권력
자의 개인적 안위를 위한 개입과 지휘부와 수사검사의 수용으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권력 자체도 위기
에 처하고 낭패를 본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순간의 이익을 위해 사건을 비틀은 결과들이다. 멀리 보고
무엇이 궁극적으로 국가 운용에 도움이 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또는 알면서도 특정 권력자의 생존과
안위를 위한 개입으로 검찰과 사회, 그리고 권력 모두가 더욱 수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p.161)⊙


출처;월간조선
2020년02월06일 11:13:2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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