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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근혜에겐 최순실이 한 명, 문재인에겐 '최순실'이 열 명"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9.06.03 03:13 | 수정 2019.06.03 05:12
'영원한 在野' 장기표씨

"사실 나는 데모할 수 있는 대학생이어서 특혜를 받았다. 나 같은 사람만 있었으면 대한민국은 벌써 망
했다. 농사 안 짓고, 공장에서 일 안 하고, 기업도 안 하고 전부 다 데모만 했으면 나라 안 망했겠나. 사
회는 다양한 부문에서 다양한 노력이 총화를 이뤄 발전한다."

장기표(74)씨를 만난 것은 열흘 전 '光州와 봉하마을, 누가 불편하게 만드나'라는 필자의 칼럼에 짧게
인용된 위의 말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나 민주화 투쟁에 관한 한 그 앞에서 명함을 내밀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그는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서울대 법대학생장(葬) 추진(1970년),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1971년), 민청학련사건(1974
년), 청계피복노조사건(1977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1980년), 5·3인천사태(1986년), 중부지역당사건
(1993년) 등 1970년부터 1990년 초반까지 주요 시국 사건에 관계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기간 다섯
번 수감돼 총 9년 이상을 살았고 더 많은 세월은 수배자로 보냈다.

"나는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대접도 많이 받았다. 한 번은 출소 후 동문 모임에 가니 내게 한마디 하라
고 해서 '나 같은 사람만 있었으면 대한민국은 벌써 망했을 것'이란 말을 했다. 우리는 대학 캠퍼스와 친
구가 있는 좋은 환경이어서 데모할 수 있었지, 동대문시장에서 포목 장사하는 사람이 아무리 민주화 의
지가 있어도 데모할 수 있었겠나. 당시 나를 취조한 수사관에 대해서도 '인간말종' '독재자 후예'로 여기
지 않는다. 그는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인생이 뒤바뀌었으면 나도 국가 안보와 사회 질서를 위
해 일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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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씨는 “나같이 데모만 하는 사람만 있었으면 대한민국은 벌써 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경


―문재인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서 한 '독재자 후예'라는 발언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런 말에 정말 분노했다. 대통령이 지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국민을 분열시키는 말을 해도 되는가.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한다. 일제 시대에 독립운동을 안 했다고 다 '친일파'라고 할 수 있나. 세상이 그런
게 아니다."

―문 대통령은 기념식장에서 "1980년 광주가 피 흘리고 죽어갈 때 광주에 함께 못한 것에 대해 그 시대
한 시민으로서 참 미안하다"며 말을 못 이었다.

"그렇게 마음 아프고 빚진 인생으로 살았다면 왜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망월동 묘역을 참배하지 않
았나. 이제 와서 이러는 것은 위선(僞善) 아닌가. 권력 유지를 위한 게 아닌가."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문 대통령의 진심을 왜 의심하는가?

"1984년 내가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조직하려고 전국을 돌았다. 부산에 갔을 때 학생운동
전력이 있다는 문재인 변호사를 소개받았다. 그에게 함께 할 것을 권하자 '이런 일에 전혀 관여하고 싶
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너무 강경해서 그 뒤로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런 분이 이제 와서 민주화 운
동을 전매특허 낸 것처럼 하기에 과거 얘기를 하는 것이다."

―대학 시절 시위 전력으로 구속된 적 있고 그 뒤 부산에서 인권 변호사로 활동한 것은 사실 아닌가?

"학생 데모를 잠깐 했을 뿐이지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이 아니다. 그를 인권 변호사로 포장하는데 사실
과는 거리가 있다. 6월 항쟁(1987년) 이후에 민주화되면서 시국 사건과 노동 사건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런 사건 몇 건을 돈 받고 맡은 적 있었는지 모르나 인권 변호사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내세
울 만한 게 있었으면 그가 벌써 밝혔을 텐데 수임 사건 내역에 그런 게 없다."

―장 선생은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면 안 된다'며 기자회견까지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왜
문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비판적인가?

"그는 애초에 정치할 뜻이 없었고 국정 운영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노빠'의 아바타로
나온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제대로 나라를 끌고 갈 수 있겠나. 나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박근혜에게는 최
순실이 한 명이지만 앞으로 문재인에게는 최순실이 열 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무슨 근거로 '최순실 열 명'을 말했나?

"나는 '운동권 내부 정서'를 잘 알고 있다. 그쪽 동네에선 운동 경력에 밀리면 꼼짝 못하는 법이다. 문재
인의 학생 시위 전력은 운동권 프로와는 비교가 안 된다. 그에게는 이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운동
권의 포로가 된다. 그쪽의 강경 주장에 따라가게 된다. 정부 부처마다 적폐 청산 기구나 과거사위원회
같은 게 줄줄이 설치된 것도 어느 주장에도 그가 반대를 못 하기 때문이다. 반대하면 제대로 운동도 안
해본 사람으로 볼까 봐 겁내는 것이다."

―과거에는 혹 그런 기분이 있었을지 모르나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도 그것에 지배된다고 보나?

"운동권에 둘러싸여 있으니 그런 정서에 지배되는 것이다. 과거 노무현도 이런 운동권 콤플렉스가 있었
던 사람이다. 현 정권에서 민주노총에 절절매는 것은 단순히 촛불 집회 때의 부채 의식 때문은 아니다.
'운동권 사쿠라'는 원래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장 선생은 과거에 '청계피복노조' 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노동운동을 해왔다. 탄압에 맞서 겨우 키워냈
던 노동 조직이 이제는 법 위에 군림한 것처럼 됐다.

"그때는 약자인 노동자의 조직을 만드는 게 옳았다. 이제는 내 개인적으로 광화문에서 최대의 기득권
집단이 된 민노총 규탄 대회를 한 적 있다. 대기업 위주의 민노총 조합원은 전체 노동자의 평균 임금보
다 3배를 받는 노동 귀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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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 선임기자와 장기표씨
/이태경 기자
―다시 5·18로 돌아가면 장 선생은 당시 무엇을 했나?

"1979년 말 출소한 뒤 김대중씨가 중심이 된 국민연합(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조직
국장을 맡았다. 시위 조직 및 배후 조종을 했던 것이다. 이게 소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다. 이 사건으
로 나는 3년 반 도망 다녔다. 김영삼 정부에서 특별법이 제정돼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자들은 모두
5·18 유공자가 됐다. 보상을 위해 유공자 등록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안 했다. 그 뒤 다른 시국 사건도
재심(再審)을 통해 보상이 이뤄졌지만 나는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민주화 보상금을 다 받았으면 몇 억원은 됐을 텐데 왜 신청을 안 했나?

"내가 관련된 민청학련사건 등은 다 실체가 있었고 당시 실정법을 위반했다. 정권이 바뀌어 재심 법정
에서 해석을 달리해 무죄로 받고 싶지 않았다. 내 행위는 오직 역사 평가에 맡기고 싶었다."

―재심 법정이 일종의 역사적 평가가 아니겠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 잘난 체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보상금을 받기 위한 재심(再審)이
어서 탐탁지 않았다."

―그 시절에 희생한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그런 운동도 안 하고 수백억씩 해 처먹는 놈들도 있는데, 큰돈도 아니고 몇억 받는 걸 넘어갈 수도 있
지만,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지식인으로서 민주화 운동을 의무로 여겼고 또 입만 벌리면 나라와
민족 운운했지 않나. 그걸 돈으로 보상받으면 우리의 명예는 뭔가. 더욱이 보상금은 박정희나 전두환이
주는 돈도 아니고 국민이 낸 돈이다."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인데, 주위 사람들에게 '보상금을 받지 말자'고 말한 적 있었나?

"혼자 잘난 척한다는 소리 들을까 봐 입밖에 안 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 시절 서울대 교수인 H씨가 교
육부 장관이 되자 1980년대 해직 교수 60여명을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선정해 각 1억3000만원씩
80여억원을 나눠줬다. 광주와 직접 관련된 사람은 두세 명밖에 없었다. 심지어 1980년 그해가 아니라
1985년, 1986년에 해직된 교수도 있었다. 이들은 김영삼 정부 시절 이미 복직됐고 밀린 봉급을 2억~3
억원씩 받았다. 높은 자리에도 많이 갔다. 그렇게 다 받아먹고 또 보상금을 주고받았지만 대부분 사람
은 민주화 운동에 부채 의식이 있어 말을 못 했다. 하지만 나는 '진짜 나쁜 놈들'이라며 분노해 글을 썼
다."

―장 선생은 재야(在野)에서는 눈부신 활약을 했지만, 정치권 진입을 시도한 뒤로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1990년 이재오·김문수·이우재 등과 함께 민중당을 창당해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게 시작이었다. 그 동
지들은 현실 정치를 깨닫고 대부분 YS 진영으로 들어가 다음에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 장 선생은 따
라가지 않았는데.

"과거 감옥에서 앨빈 토플러의 '미래의 충격' '제3의 물결' '권력이동'을 읽고서 정보화 사회가 새로운
문명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나는 독자적인 정치 이념을 만들었다. 기존 정당으로는 이를 구
현할 수 없었다."

―선거 때마다 정당을 새로 만들어 출마했고 낙선했다. 이 때문에 '창당 전문가'로 조롱받았다. 창당 행
적을 보면 같은 이상이나 가치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한 것도 아니었다. 기존 정당의 공천 탈락자들과
손잡거나 이념이 다른 신생 정당과 합당하는 식이었다. 그럴 바에는 기존 정당에 들어가는 게 맞지 않
았나?

"당을 만들려면 그런 사람들도 필요했다. 그 사람들이 나를 따라온 거지, 당의 코어(핵심)가 중요한 것
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기존 정당은 우리나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나는 해법을 갖고 있다고 자부한다."

―정치는 현실과 세력에 종속되는 것이다. 이재오 전 의원이 "이명박 정권 때 장기표에게 지역구 공천과
장관직을 제안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고 말하더라. 이 말을 듣고 장 선생을 다시 봤다. 하지만 기존 체
제에 들어가 뜻을 구현할 수도 있지 않나?

"과거 김대중 정권에서도 나를 원했다. 한나라당에서도 김문수가 공천심사위원장을 할 때 최상위 순번
의 전국구를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거절했다. 내 뜻을 구현하기 위해 정치를 하려는 거지. 나는 기존
정당의 한계를 지적해왔다. 내가 한 말을 내가 안 지키면 되겠나."



출처 : 조선닷컴
2019년06월03일 12:30:0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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