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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 칼럼] '불길한 예감'최보식 선임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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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메일 인쇄 입력 : 2011.06.02 23:33 / 수정 : 2011.06.03 07:29
▲ 최보식 선임기자 선거캠프 참모가 여론조사를 보고했다 "이렇게 가면 집니다" 이회창 후보는 짜증스럽게 "그렇지 않은 조사도 있지 않으냐"며 보고자를 나무랐다
한 보수 인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한밤중 모 신문사 인터넷에 잠깐 떠있던 '대선후보 가상대결' 여론조사를 본 것이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뒤꼭지, 4.1%포인트 차까지 따라왔다. 여론조사 오차 범위 내다.
이 여론조사기관의 대표는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 근무했던 민주당 사람이다. 조사원들이 직접 전화를 돌린 것도 아니고 ARS(자동응답장치)의 기계음으로 조사했다. 신뢰도를 문제 삼을 만하다. 인터넷에 올렸다가 금방 내린 것도, 다른 보수 매체에서 인용하기를 꺼린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강원지사 선거 때 '엄기영 절대 우세' 여론조사가 쏟아졌을 때, 이 기관만 '박빙' 결과를 내놓은 적이 있다.
사실 여당이나 보수 진영에서는 어떤 불길한 예감을 갖고 있다. 박 전 대표가 '대세'고 당내에선 '절대 강자'이지만, 본게임에서는 어떨지 모른다는 것이다. 좀 더 냉소적으로는 "지금까지 혼자만 뛰어 1등일 뿐"이라고 한다. 고정표가 확실한 반면, 표의 확장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는다. 지금보다 표가 훨씬 더 늘어나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석에서 한 선거전략가는 "그에게 '몰빵'한 보수세력은 낭패를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박 전 대표측에게 이는 반대파들의 끝없는 음해와 비방에 불과하다. '대변인 격'이라는 의원은 즉각 반박하고, 박사모 등 추종세력은 전화와 댓글 공세를 퍼붓는다. 박 전 대표가 시켜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주위에는 그의 심기에 맞추려는 인물들만 살아남은 것 같다. 그를 비판의 '성역(聖域)'에 모셔두려고 한다.
이들은 박 전 대표가 자연인이 아니라, 보수층의 기대주이며 나라의 장래와 관계 있다는 걸 잊어버린다. 무엇보다 그가 한나라당과 같은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다. 배는 난파 직전이다. 앞 열에 소장파 의원들을 앉히고 '복지 선심'을 베푸는 걸로는 결코 구출할 수 없다. 누가 배를 지휘하느냐에 달렸다. 명성과 실력을 갖춘 인물로 선장이 교체되는 순간, 국민은 "한나라당이 바뀌겠구나" 체감할 것이다.
대선 후보와 당 대표를 분리하는 현행 당헌·당규로는 이런 기대가 어려워졌다. 그의 경쟁자들이 당의 무대에 올라와 부각될 기회는 막혔다. 후보 경선에서 박 전 대표는 반나절도 안 돼 당내 선수들을 KO시켜버릴 것이다. 관중들은 구경할 맛을 잃고 함께 달아오를 기회를 얻지 못한다. 박 전 대표의 매력도 충분히 발휘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경쟁자들이 "당의 이념과 가치관은 쉽게 바꾸면서 이런 상황에서 당헌·당규는 왜 못 바꾸느냐"고 떠들면 체면이 없다. 원칙을 지키자는 박 전 대표가 비판받을 일은 아니다. 그의 어려운 '양보'를 기다리는 게 옳다. 경쟁자의 체급을 키워주면서 전체 당의 분위기를 살리고 자신에게는 아슬아슬한 게임을 벌일지는 그 자신이 결단해야 한다.
설령 박 전 대표가 당내 승자가 된다 해도, 본선에서는 추종세력의 표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그에게 주저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집단의 폐쇄성, 어떤 나라로 이끌지 알 수 없는 머릿속, 침묵 후 원론적인 말들, 신비주의…. 시간이 갈수록 국민에게 쌓이는 이 '박근혜 피로증'을 풀어주지 않는 한 쉽진 않을 것이다.
곧 출간될 최병렬 한나라당 전 대표의 회고록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2002년 12월 대선이 있기 얼마 전, 이회창 후보가 선거캠프의 핵심 참모들을 조선호텔로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이렇게 갈 경우 진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보고됐다. 이회창은 짜증스럽게 '그렇지 않은 여론조사도 있지 않으냐'며 보고자를 나무랐다. 참모들은 '어떻게 하든 JP에게 도와달라고 하자'고 제안했다. 단 몇 표라도 더 끌어오는 것은 이 길밖에 없었다. 이회창은 화를 냈다. 참모들은 헤어지면서 '이걸로 선거는 끝난 것 같다'며 허탈해했다. 이회창은 2.3%포인트(57만표)로 졌다.
이회창은 측근에게 둘러싸여 광범위하게 인재를 모아 활용하지 못했다. 자신의 생각을 너무 고집스럽게 믿었다. 이는 본인의 대권 재수(再修) 실패만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보수세력 전체의 좌절, 대한민국의 방향이 왼쪽으로 더욱 선회하게 되는 중대한 역사적 과오로 이어졌다."
내게 전화를 건 지인도 박근혜 전 대표에게 매달린 보수세력의 좌절을 우려한 것이다. 마침내 나는 답했다.
"왜 박근혜가 꼭 돼야 하나. 손학규도 한나라당에 쭉 있었고, 반값 등록금과 부자감세 철회 등으로 잘살게 해주겠다고 한다. 한나라당은 벌써 그걸 따라가고 있지 않은가. 사실 누가 된들 무엇이 크게 달라지겠느냐. MB는 550만표 차로 압도적으로 이겼지만 지금 보수의 가치가 이뤄졌는가."
그가 기대하던 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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