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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와 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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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崔秉默 편집장
대학 2학년 때인 1979년 기억입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타계하자 집권 여당(공화당)이 말 그대로 지리멸렬할 때였습니다. 신문에 보니 정풍(整風)운동 기사가 많았습니다. 박찬종(朴燦鍾), 오유방(吳有邦) 의원 등이 주도자였습니다. 당시 박 의원은 40세, 오 의원은 39세였습니다. 부패 정치인 퇴진이 주요 요구사항이었죠. 공화당 18년 동안 정치인의 부패가 실제는 큰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도 통치 비자금이 엄연히 있었고 관행이기도 했는데 독재이다 보니 문제가 되지 않았나 봅니다.
젊은 정치인들의 활약에 약관(弱冠)의 정치학도인 전 상당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거수기(擧手機)인 줄로만 알았던 여당에도 그런 정치인들이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사실 당시 대다수 대학생은 독재정치에 저항하는 야당에만 관심이 쏠려 있을 때니까요.
정풍운동의 진행과정과 박·오 의원의 활동을 열심히 찾아 읽었는데 언제부터인지 관련기사가 사라졌습니다. 그것이 정풍운동 주도자의 좌절 때문이었는지, 신군부의 언론통제 탓인지는 정확히 몰랐습니다. 박찬종씨는 그 후 정풍운동파의 다수가 신군부의 민정당에 투항한 것이 상당한 원인인 것처럼 말했더군요.
요즘 말로 해 이런 움직임으로 ‘뜬’ 정치인 박찬종은 어떻게 됐을까요. 제가 결혼 후 서초구 잠원동에 전세 살 때 그가 국회의원 후보로 바로 그곳에 출마했더군요. ‘무조건’ 박 후보를 찍었죠. 여당 정풍운동의 주역이란 점 하나만 믿고서요.
제가 정치부 기자가 되고 난 후 그를 취재하게 됐습니다. 1997년 신한국당 시절인데 그는 ‘무균질(無均質) 정치인’이란 캐치프레이즈로 여전히 명성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많은 시간 열심히 취재한 결과 그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고, 약점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단독 플레이에 능했습니다. 암기 공부 같은 것 말이죠. 혼자 하는 일은 잘하는데, 여럿이 하는 일엔 약했습니다. ‘패거리’가 몰려다녀야 하는 정치에는 맞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다 알게 된 후 엄청나게 실망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자고 나니 유명해진 정치인들
1992년에도 전 좀 뜬다 싶은 정치인을 또 취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종찬(李鍾贊)씨였죠. 그는 민자당에서 김영삼(金泳三·YS)씨와 맞붙는 민정계의 대표주자가 됐습니다. 오랫동안 여권의 실세(實勢) 정치인이었던 점과 56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 때문에 상당한 주목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당시에는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에서 개혁파 옐친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등 국제정세가 혁명적 변화를 겪고 있던 터라 이종찬 경선 후보는 ‘한국의 옐친’을 자처하며 인기몰이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정계의 상당수를 장악해 대세론을 형성한 YS를 뛰어넘지는 못했습니다. 민정계의 주축인 TK(대구·경북)의 대부(代父) 김윤환(金潤煥)씨가 이미 YS 진영에 합류한 상태여서 전세 역전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조직의 힘에 밀린 것이죠. 더구나 부산·경남이라는 YS의 지역적 기반 때문에 서울에서 줄곧 정치를 해온 이종찬 후보로선 자신의 한계를 확인한 도전에 불과했던 것이었습니다.
당내 경선(競選) 상황이 불리해지자 그는 돌연 탈당을 감행하더군요. 문제는 그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하던 국회의원들과도 별다른 상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경선 캠프 내 핵심 몇몇이 결정해 통보하는 형식이 되다 보니 행동통일이 될 리 만무하지요.
결국 YS식의 구태정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며 뭉쳤던 ‘이종찬 캠프’의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맙니다. 취재하는 동안 ‘정치적 미아(迷兒)’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을 정도입니다.
기성정당·후보에 대한 불신 보여준 1997년 대선
이런 일은 1997년에도 또 있었습니다. 이인제(李仁濟) 경기지사가 주인공입니다. 그가 경선 출마를 선언했을 때인 그해 3월만 해도 당내 반응은 시큰둥 그 자체였습니다. 심지어 어느 원로는 공개적으로 구상유취(口尙乳臭·말이나 하는 짓이 유치하다는 뜻)라고 표현했을 정도니까요. 그때 이 지사의 나이가 49세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활성화된 TV토론은 경선 판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신한국당의 9룡(龍)이라는 경선 후보들 중에서 거의 꼴찌로 출발했던 이인제 지사는 TV토론을 거칠 때마다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의 육군 병장 제대가 당시 대세였던 신한국당 이회창(李會昌)씨 아들의 병역 의혹과 더욱 대비되기도 했지요.
이런저런 사정과 과정을 겪으며 이인제 지사는 신한국당을 탈당해 독자 출마의 길을 걸었습니다. 양대 기성 정당에 맞서 ‘돈 안 드는 선거’를 내세우며 바람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천문학적인 돈이 든다는 대선에서 새 정치를 하겠다는 차별화 전략으로 승부했던 것입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국회의원 수를 200명으로 줄이겠다는 공약도 했습니다. 당내 경선에 불복해서 탈당한 부도덕성을 접어둔다면 여러 면에서 유권자들에게 신선함을 보여줬던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인제 후보는 그렇게 완주(完走)해서 493만 표(19%)를 얻었습니다. 갑자기 등장한 대선 후보가 온갖 불리한 여건 속에서 이 정도 표를 얻은 것은 그만큼 기성 정당과 기성 후보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이 만만치 않았다는 방증이겠지요.
2001년 김대중 정부 때도 정동영(鄭東泳) 의원이 바람을 일으키며 급부상한 적이 있습니다. 당대 최고 실세였던 권노갑(權魯甲)씨를 무너뜨린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여세를 이듬해 대선 후보 경선까지 연결시키지는 못했습니다.
리더의 카리스마 보여주지 못하는 안철수
우리는 몇 달 전에 또 그런 일을 목격했습니다. 이번에는 정치에 아예 입문조차 하지 않았던 안철수(安哲秀)씨가 주역이었습니다.
젊은 층의 폭발적인 호응에 힘입어 무소속 대선 후보가 되겠다며 선거운동을 하다가 야당과 후보 단일화 협상을 하는가 싶더니 돌연 포기하고 야당 후보를 도왔죠. 대선 결과도 보지 않고 미국으로 갔다가 82일 만에 돌아와 서울 노원병(丙) 재보궐선거에 뛰어들었습니다.
젊고(2012년 당시 50세), 정치개혁·새 정치를 주장하고, 심지어 국회의원 정수 축소까지 앞의 여러 예와 많은 점에서 흡사합니다. 이름만 바꾸어 넣으면 거의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철수씨를 포함해 이들이 모두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역 기반, 조직과 같은 하드웨어적 요소에다 신선함, 결단력, 유권자와의 소통 등 소프트웨어적 요소가 결합해야 했는데 그게 부족했던 것입니다. 안철수씨는 정치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니 앞의 정치인들보다 더욱 그렇습니다.
다소 들떠 있는 상태의 유권자를 짧은 기간 호도(糊塗)할 수는 있어도 검증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지난 대선 기간 중 그가 보여준 행태는 그에게 기대를 걸던 상당수 ‘개혁적 유권자’들을 엄청나게 실망시켰더군요. 그런데도 기자들을 피해 외국에 나갔다가 들어와서도 그는 그다지 변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신비주의입니다. 야(野)인 듯하면서도 아닌 듯한 모호한 정체성, 노원구라는 야당 텃밭에 명함을 내미는 소심함, 제1야당 민주당에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은근한 압박까지 하는 비겁함….
정치부 기자를 오래한 제가 보기에 안철수씨는 또 한 번의 중요한 기회를 놓쳤습니다. ‘2012년 철수’는 아마추어였는데, ‘2013년 철수’는 프로 무대에 데뷔한 신인 선수 정도는 된다는 것을 보여줬어야 했고, 그 좋은 기회가 이번이었다는 것입니다. 벌써부터 노원병에서 예비후보들 간 치고받는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승부를 확실히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지요. ‘철수’는 이미 2011년 서울시장 선거, 2012년 대선에 이어 다시 ‘정신적 2등’이 돼 버렸습니다. 이러다가 ‘철수’가 ‘영이’(영원한 2등)가 되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성급한 예상마저 해봅니다. 승부의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승부의 철학인데 말입니다.⊙
출처;조선닷컴의 편집장의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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