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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 칼럼] '정치판 퇴물'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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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 2012.10.18 23:30 | 수정 : 2012.10.19 03:16
유독 이번 대선판에는 벌써 물러났을 사람들이 변신술 보이며 각광 받는다
계절을 잘못 읽고 초가을에 막 피어난 南道의 벚꽃처럼
최보식 선임기자 'DJ 전 비서실장' 한광옥씨를 모셔오고, 며칠 뒤 동교동계 전직 의원들이 "과거와의 화해와 용서를 위해 밀알이 되겠다"며 우르르 마이크 앞에 섰을 때, 또 이들을 대동하고 4·19묘역을 참배했을 때 박근혜 캠프는 '동서(東西) 화합'의 감격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녁 무렵 골목 대폿집에 들어서면 전혀 다른 얘기가 들리는 걸 알지 못한다.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둘러앉아 "정치 퇴물들은 저렇게 또 등장하는구나. 뒷전으로 물러난 인물들을 다시 부활시키는 것은 무슨 조화인가. 지금이 대체 어느 시기인가"라며 안줏감으로 삼고 있을 따름이다. 당초 박근혜 캠프에서 내건 '통합' 명분은 간데없고, 새 시대를 열고 새 정치를 하겠다면서 왜 낡은 인물들을 다투어 불러들이는지에만 궁금해한다.
대선 캠프의 불행은 늘 바닥 서민의 관점(觀點)과 어긋나는 데 있다. 머리를 굴려 표 계산을 하는 쪽에서는 한광옥씨 일행이 '호남의 대표'로 크게 보였겠지만, 서민에게는 한 시절을 풍미하며 권세를 누렸던 '언제 적 사람'으로 비칠 뿐이다. 벌써 물러나 잊혀도 전혀 아쉬울 게 없다. 그럼에도 호시절의 미련을 못 버려 이 정당에서 저 정당, 이 논리에서 저 논리로 갈아타는 낯 두꺼운 정치인만 있다. 그런 이들을 불러모아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지겠다'고 하니 허무한 스토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젊은 친구들은 본능적으로 "저들로 또 채워지니 앞길이 더 꽉 막히겠구나"라고 느끼고, 나이 든 가장들은 "평생 피곤에 찌든 우리 삶과는 다르구나"라며 체념할 것이다. 진정 '국민 통합'이 목표라면, 눈앞에서 이런 인물들을 가능한 한 안 보게 하는 게 더 국민적 통합 효과가 있을 게 틀림없다.
나는 왕성하게 활동하려는 노년을 존경한다. 이들의 경험과 학식, 지혜는 늙지 않고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들도 많다. 하지만 노년의 역할은 시대의 앞자리에 있지 않다. 어느 시대에도 '주역(主役) 세대'가 있는 법이다. 그런 주역을 몇 번이나 해본 노년들이 여전히 무대의 조명을 받겠다고 버티는 것은 분별없는 탐욕과 같다. 이 때문에 정말 세상에 책임을 져야 할 40·50대는 할 일을 잃고 뒷전에서 서성거린다.
경륜이 있다 해도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는 늙음은 존경받기 어렵다. '원로'와 '퇴물'의 차이는 여기서 갈린다. 변화하는 시대를 이끌어가는 것은 후배들의 몫으로 넘겨야 한다. 유독 이번 대선판에는 벌써 쉬었어야 할 사람들이 변신술을 보여주면서 각광을 받고 있다. 계절을 잘못 읽고 초가을에 막 피어난 남도(南道)의 벚꽃처럼.
첫 신호탄은 5·6공(共)에서 잘나가다가 민주당 의원을 거쳐 박근혜 캠프의 좌장(座長)으로 옮겨온 김종인씨였다. 자신의 철학인 '경제 민주화'를 들고나와 위기의 새누리당에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뜻대로 안 되면 함부로 말을 하고 사사건건 충돌했다. 설령 그의 주장이 옳다 해도 세상에 비친 그의 모습은 노욕(老慾)으로 권력 투쟁을 불사하는 인간 쪽에 가깝다.
안철수 후보와 손잡은 '관치(官治) 금융의 상징' 이헌재씨도 어느 날 등장했다. 그동안 자신이 관여했던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한 책을 내면서. 안 후보가 출마 선언을 위해 단상에 오르기 전 유일하게 인사를 해 카메라 세례를 받은 것은 그에게 불운이었다. "새 정치를 펼칠 분이 어떻게 저런 구닥다리와 손을 잡느냐"는 비판 여론에 그는 안 후보의 대부(代父)에서 '자문위원'으로 격이 떨어졌다. 하지만 조만간 국정자문단장을 맡아 전면에서 맹활약할 것이다.
이헌재씨보다 더 공개적인 망신을 당한 윤여준씨의 경우는 철벽처럼 꿋꿋하다. 그는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를 이어오며 득세했고, 이회창 후보의 핵심 측근이었다. 그런 그가 안철수씨의 '멘토' 행세를 하다가 안씨로부터 "그분이 제 멘토라면 제 멘토는 김제동·김여진씨 등 300명은 된다"는 소리를 들었다. 체면 잃는 것은 잠깐이다. 그는 문재인 캠프로 가서 '국민통합추진위원장'이 됐다. 몇년 전 그는 월악산 아래에 전원주택을 지었다. 그 주택은 쭉 비어 있을 것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나라의 앞날을 위한 힘든 결단"이라고 말한다. 여기가 자신이 설 무대가 맞는지를 돌아보는 이들은 없다. 이들 탓만 할 것은 아니다. 대선 캠프마다 다투어 명망가를 끌어들이느라 난리다. '퇴물'이라면 뒷전에서 쭉 쉬도록 버려두는 게 옳고, '원로'라면 정치 구정물이 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게 도리다. 하지만 표 계산만 하면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다.
대체 시인 김지하와 연극배우 손숙씨까지 불러들였으면 어떻게 할 요량이었을까. 이번 한판 선거로 모든 걸 말아먹을 기세다. 자칫 우리 사회에는 정파와 무관하게 존경받는 원로를 한 명도 못 찾을 날이 올지 모른다.
출처;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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