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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래를 당신에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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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인
작가 다고 기치로 씨의 모습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서점에서 한 권의 책을 접했다. 개나리처럼 노란 책의 표지가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제목이 특이해서다. '야나기 가네코의 조선을 노래하다(21세기 북스)'라는 책이었다. 책의 원제목은 '나의 노래를 당신에게-야나기 가네코의 절창조선(絶唱朝鮮)'이다. 작가는 다고기치로(多胡吉郞, 53세) 라는 사람이었다. 생생한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 진 책의 내용이 재미있어서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었다. 수차례의 메일을 주고받은 후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조만간 한국을 방문한다고 해서 작가와의 만남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약속한 날이 되어 서울 시내의 한 호텔 로비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다. 사진으로 얼굴을 익힌지라 그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평범한 차림새는 서민적인 냄새가 풍겼고, '착함'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연상되었다.
"경기도 이천의 형님 집에서 올라왔습니다." 필자와 악수를 나누면서 건넨 다고기치로(多胡吉郞, 53세) 씨의 첫마디다.
한국적인 정의 세계에 빠져
야나기 가네코(柳兼子) 씨현재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고기치로(多胡吉郞, 53세) 씨는 1980년 일본의 국영방송인 NHK에 입사하여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그는 한·일 도예프로그램 제작과정(1983년)에서 도예가 조성주 씨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들의 인연은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다고(多胡) 씨는 조성주 씨 가족과의 인연을 소재로 한권의 책을 엮어 내기도 했다. 어느 회사의 광고와 흡사한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책(21세기 북스)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 시절의 애절한 사연들을 담은 '야나기 가네코의 조선을 노래하다'라는 소설을 정성스럽게 빚어냈다. 감동의 연속이다.
다고기치로(多胡吉郞) 씨는 조성주 씨 부부에게 '형님·형수님'이라고 호칭하고, 아이들은 '다고(多胡) 삼촌'이라고 부른다. 그는 한국에 오면 가장 먼저 경기도 이천의 형님 집으로 줄달음친다. 무슨 이유에서 일까? 그는 '조성주 씨 가족을 만나면 마음의 갈증을 풀어주는 풍요로움이 있다'고 했다.
"도쿄의 일상 속에서는 얻을 수 없는 무엇- 마음의 갈증을 풀어주는 풍요로움이 조성주 씨를 비롯한 한국의 가족들에게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다고(多胡) 씨의 말이다.
일본인 다고(多胡) 씨가 한국에 '또 하나의 가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는 '한국과 한국인의 정(情)의 세계는 독특하다'고 했다. 그의 말에서 한국적인 정의 세계와의 공명·공감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우리의 가족들이 정(情)의 세계에서 일탈하고 있다.
야나기 가네코(柳兼子)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해인사에서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씨(사진: 주간동아)
'야나기 가네코(柳兼子)'는 도쿄(東京) 출신으로 1910년 도쿄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했다. 1914년.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와 결혼하여 3남(宗理, 宗玄, 宗民)을 두었다. 그녀는 일본 관동지방에 있는 치바현(千葉縣)의 '아비코(我孫子)에서 신혼생활을 했다. 신혼 시절부터 일본정부의 조선 동화정책에 반발하여 남편과 함께 조선에서 리사이틀을 개최하는 등 조선의 많은 사람들과 친교를 맺었다. 그녀는 1928년 독일에 유학하여 베를린에서 리사이틀을 개최하여 현지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본 최고의 리트(독일 가곡) 가수로도 정평이 나 있다. 또한, 가네코(兼子) 씨는 일본 정부로부터 '군가를 부르라'는 것을 거부한 이유로 30년 간 자유학원 강사로 야인 생활을 했다. 85세까지 공식 리사이틀을 개최했고,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후진 양성에 힘을 쏟다가 92세의 나이로 아름다운 생을 마감했다.
가네코(柳兼子) 씨의 남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씨에 대해서도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그녀의 조선 사랑은 남편 무네요시(宗悅)로 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무네요시(宗悅) 씨는 도쿄(東京)출신으로 가쿠슈인(學習院)을 거쳐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했다. 전공은 종교철학이었다. 가쿠슈인(學習院) 재학 중 문학동인지 시라카와(白樺)를 창간했고, 미술사와 민예 연구가로 활약하면서 도쿄에 민예관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도 정열을 쏟았다. 일본인이면서도 조선 총독부에 맞서서 광화문의 철거를 적극 반대하였으며, 1924년 조선민족미술관을 건립했다. 그의 부인 가네코(兼子)와 함께 미술관 건립을 위해 음악회를 열어 모금 활동을 하기도 했다. 천재시인 남궁벽(南宮壁, 1895-1922)과 폐허의 멤버인 염상섭, 변영로, 오상순 등과 인간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을 도왔다. 특히, 남궁벽과는 각별한 인간관계를 가졌었다.
소설 속으로.....
<때는 1920년 5월 4일. 음악회는 저녁 7시부터 종로의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개최되었다. 수용 인원이 1,300명 이었는데, 이를 훌쩍 뛰어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한 시간이나 늦게 시작되었다. 일본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조선 사람들이었다. 폐허의 동인들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남궁벽(南宮壁)은 공연의 총책임자처럼 무대 곁에서 음악회의 진행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아일보를 대표하여 염상섭이 개회사를 했고, 무네요시(宗悅)가 염상섭의 통역으로 청중들에게 인사를 했다.
드디어 가네코(兼子)가 무대에 등장했다. 음악회의 서곡은 가극 '마뇽' 중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 나라를'과 '불쌍한 아이가 먼데서 왔다'라는 아리아였다.
"오렌지 꽃이 피는 나라를 아시나요?
금빛 과실과 붉은빛 장미의 나라를
미풍이 조용히 불고, 새가 경쾌하게 노래하는 나라를"
가네코(兼子)는 청중들의 반응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꼈다. 그녀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준비했다. 내성적이고 깊은 맛이 나는 독일 '리트(Lied)'의 세계가 펼쳐졌다. 조선 백자를 통해 가네코(兼子)는 그 아름다움에서 종종 슈베르트의 음악을 떠올렸다. 도자기를 만질 때마다 그 살갗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은 그 음악이 깊은 곳에 품고 있는 따스함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슈베르트의 가곡을 부르는 것은 조선 사람들에게 노래를 바치겠다는 그녀 마음의 핵심이었다. 음악임과 동시에 시(詩)의 세계와 긴밀하게 연계되어 기도 차원으로 승화되어 있었다.
"오오,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늘의 아버지시여!
당신이 만드신 세계가 빛이 지상으로 내려와, 먼지가 미광에 채색될 때
구름에 반짝이는 저녁노을이, 나의 조용한 창에 떨어질 때"
가네코(兼子)는 로멘티즘을 머금은 고요한 정복(淨福)을 엄숙하게 노래했다. 그녀는 남궁벽(南宮壁)의 영시(英詩)에 나왔던 Holy Garden을 생각하고 있었다.
"I have another world in which I have:
"Holy Garden'-that is what I call my another world"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고독한 청년. 남궁벽은 슈베르트의 곡은 상실자의 음악이라고 했었다. 그러면서 그는 '슈베르트에서 빛을 느낀다'고 했다.
"폐허와 같은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이 곡에서 삶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바란다. 절망에 빠지지 말고 희망의 빛을 붙들었으면...."
청중들은 모두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눈동자가 젖어 반짝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가네코(兼子)는 열기의 정체를 드디어 알 수 있었다. 놀라운 기쁨이었다. 가네코(兼子)는 청중들을 향해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드디어 박수소리가 일기 시작했다. 일단 박수소리가 들리자 파도처럼 삽시간에 객석으로 퍼져나가 커다란 감동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넘쳐흐르는 눈물은 닦을 생각도 않고 사람들은 가네코(兼子)에게 갈채를 보냈다. 남궁벽의 눈에서도 청중들과 같은 종류의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사모님, 조선의 마음에 슈베르트가 스며들었습니다. 물론, 저도 감동했습니다."
'당신들은 결코 고아가 아닙니다'
"비록 구름에 싸일지라도, 태양은 여전히 천국의 막에서 빛나네.
거기서는 성스러운 의지가 모든 것을 다스리지
어둡고 흐린 눈으로, 세상을 다스리지
영원히 순수하고 맑은 눈만이,
모든 창조 뒤에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식민지 통치는 우매함의 소산이었다. 그 비인간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노래는 그 부당함을 인식하지만, 그 너머로 영원의 빛을 희구한다. 사람들은 그 빛에 감명을 받았다.
자신의 신념과 뜻, 그 강인한 부분도 나약한 부분도 노래가 전부 받아들여 사랑의 바다로 품어줄 것만 같았다. 그러한 느낌이 휩싸이게 한 것은 가네코(兼子)의 노래가 처음이었다.
나혜석은 6개월 동안이나 갇혀 있었던 차고 어두운 감옥을 생각했다.....음악이 담고 있는 깊고 커다란 마음의 바다에서 눈물과 함께 해방감을 맛봤다.
베르디의 아리아가 끝나자 사람들은 노래의 매력에 몸과 마음을 도두 빼앗겨 생명 자체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객석과 무대는 커다란 기운 속에 휩싸였다. 슈만의 '달밤', '차이코프스키의 어찌 장미는 이같이 야위었나',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의 '무(無)'였다. 독일 리트에 러시아 음악까지 더해 노래의 향기가 전해지도록 배려했다. 남궁벽이 노래했던 '세계 예원' 이라는 이상을 가네코(兼子) 나름대로 의식한 결과였다.>
"조선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결코 고아가 아닙니다. 세계의 벗들은 당신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정치적 역학관계를 초월하여 예술의 우주에서 날개 짓 한다면 당신들은 틀림없이 세계 예원의 동포입니다."
<음악회가 끝났다.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커튼콜을 받은 뒤 홀의 불이 꺼졌을 때는 이미 밤 10시가 되어있었다. 밤이 깊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대기실로 몰려와 좀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소설속의 노래 곡목이 "베버의 '마탄의 사수'의 아리아가 '자유의 사수'라는 제목으로 노래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너무나 자극적이었을 것습니다." 작가 다고기치로(多胡吉郞) 씨는 눈을 지긋이 감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출처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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