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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 낭자한 주말 史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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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 국제부 차장
입력 : 2012.09.14 22:37
김태훈 국제부 차장
지난 토요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 거실에 앉아 TV를 켰다가 마침 이날 첫회를 내보내는 사극(史劇)이 시작되는 것을 보고 바로 TV를 껐다. 주말 저녁 기분을 망쳐버릴 살육(殺戮)의 참상을 보게 될 게 뻔했고, 사람을 함부로 죽여대는 폭력 장면에 아이들이 노출되는 것도 싫었기 때문이었다.
안방에서 혼자 TV를 켜봤다. 시계를 보니 극이 시작되고 3분쯤 지났고 이미 칼부림이 한창이었다. 첫 싸움은 창에 가슴을 관통당한 병사가 즉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10분쯤 흐른 뒤 두 번째 살인극에선 흉기가 가슴에 박히는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줬다. 60분짜리 드라마를 보는데 병기(兵器)를 휘둘러 살인하는 장면이 34분쯤 지났을 때와 51분쯤에 한 번씩, 그리고 극이 끝나기 직전에 또 한 번 등 모두 5번 나왔다. 드라마 한 편 보는데 적어도 50명 이상 피를 뿌리고 죽은 것 같다.
이튿날 저녁 일부러 그 드라마의 2회를 시청했다. 방송 시작하고 2분쯤 지났을 때 첫 죽음이 있었고, 이어지는 30초 동안 4명이 더 죽었다. 이 전투의 마지막 컷은 "제발 목숨만 살려달라"며 손을 싹싹 비는 병사의 가슴에 언월도로 보이는 큰 칼을 무자비하게 쑤셔넣는 장면이었다. 이건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닌가. 많은 사람을 끔찍한 방법으로 죽여대는 장면을 주말 저녁에 전국 가정집에다 송출하는 방송사가 대한민국 말고 또 어디에 있을까 싶었다. "보기 싫으면 채널을 돌리라"는 반박이나 '15세 이상 시청' 안내 따위는 공중파의 무차별적 파급력과 공공성에 비춰볼 때 무책임한 변명에 불과하다. 내 큰아이는 만 15세가 넘었지만 실수로라도 TV를 켰다가 사람 목숨을 함부로 빼앗는 살상극을 보게 될까 봐 걱정이다.
이틀간 지켜본 사극은 '대왕의 꿈'이라는 작품이다.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리더십을 재조명한다더니 고작 요란한 전투 장면과 사람 죽이는 눈요기로 시청자를 꼬드기는 것 같아 불쾌했다. 이 사극만 그런 것도 아니다. 같은 시간대에 방영된 사극들의 거의 전부가 주말 저녁을 피와 단말마의 비명으로 물들인 지 이미 오래다. 얼마 전 끝난 '광개토태왕'은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를 넓힌 영웅담인지 희대의 학살자 얘기인지 헷갈려 보기 민망했다. 사극들의 폭력 묘사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는 것도 큰일이다. 칼이 몸에 들어가고 사지를 절단하는 장면이 너무 자세하고 끔찍해서 눈을 뜨고 볼 수가 없다.
재작년 서울 잠원동에서 발생한 흉기 살인사건의 범인은 밤마다 칼싸움으로 사람 죽이는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이를 실행에 옮긴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온 국민을 불안에 떨게 했던 성폭행범들은 한결같이 포르노 영상을 탐닉한 공통점을 보인다. 정신과 전문의와 범죄 연구자들은 살인·강간 등 강력범죄자의 삶에 이런 '나쁜 영상'들이 스며들어 있다고 지적한다. 자극과 폭력으로 얼룩진 영상물이 뇌를 중독 상태에 빠뜨리고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혼동하게 하며 충동 억지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사람을 벌레 잡듯 하는 사극을 방송이 스스로 절제하지 못한다면 강제로라도 과도한 폭력 장면을 틀지 못하게 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출처;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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