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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심의 ‘왕회장‘ 세계를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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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영 전 건설부 장관의 ‘중동건설 이야기’<2>
허재영 전 건설부 장관2012.01.08 13:45:46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이 여러 가지 있다. 소 1,000마리를 몰고 북한으로 간 일, 유조선으로 서산 간척지의 물막이 공사를 성공시킨 일, 500원짜리 동전으로 조선 계약을 맺어 미포조선소를 건설한 일과 ‘포니’로 현대자동차를 일으킨 일,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재벌, 전경련 회장, 국민당 대통령 입후보자가 된 일 등이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과 더불어 개발 연대 경제계의 두 거두로서 몇 백 년 만에 나올까 말까하는 뛰어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76년 6월 16일 주베일 산업항 공사가 정식 체결됐다. 공사 계약서 서명식에서는 한국을 대표해 유양수 대사와 사우디 교통체신청 장관이 서명했지만 그에 앞선 협정식에서는 정문도 사장, 정주영 회장, 교통체신청장이 서명했다(왼쪽부터).
▲76년 6월 16일 주베일 산업항 공사가 정식 체결됐다. 공사 계약서 서명식에서는 한국을 대표해 유양수 대사와 사우디 교통체신청 장관이 서명했지만 그에 앞선 협정식에서는 정문도 사장, 정주영 회장, 교통체신청장이 서명했다(왼쪽부터).
그런데 그가 해외, 특히 사우디에서 이와 비슷한 일을 해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76년 중동 붐이 한창 일기 시작할 때의 일이다. 현대건설이 10억 달러에 달하는 20세기 최대의 역사로 불렀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서 시공하는 과정은 참으로 드라마틱했다.
현대건설이 열 개 가운데 마지막 하나 남은 입찰자격을 간신히 따냈지만 입찰 보증서를 얻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 당시 한국 업체에 대한 외국은행의 신용평가가 형편없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현대건설이 수리조선소를 건설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입찰 직전에 바레인은행을 통하여 보증서를 겨우 받아냈다.
공사 입찰에서 현대건설은 어떻게든지 공사를 따낼 욕심으로 25%나 덤핑을 했다. 2위 입찰자에 비해 무려 5억 5,000만 달러나 싼 9억 3,000만 달러였다. 참으로 두둑한 뱃장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국내에서는 큰 공사를 땄다고 환호하기보다는 5억 달러 이상이나 덤핑했다며 국회와 언론 등에서 야단법석이었다. 현대건설이 망하면 국가가 망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외환보유액이 10억 달러 안팎이었으니 그럴 만할 일이기도 했다.
한편 사우디에서는 2위로 입찰한 유럽 컨소시엄 업체를 비롯하여 입찰에 참여했던 업체들이 모두 들고 일어났다. 후진국 업체인 현대건설이 해상터미널 같은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공사를 시공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낙찰대상에서 제외시키라는 것이었다. 사실은 이들의 주장이 맞는 말이었다. 해상구조물에 대한 공사경험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지식도 없었다.
난처한 입장에 놓인 발주처는 현대건설과의 계약협의를 망설였다. 2위 업체의 뒤에는 힘센 왕자가 다섯 명이나 에이전트로 도사리고 있었다. 발주처의 차관, 차관보, 국장들도 2위 업체 편에 가세하여 대세가 그쪽으로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외환 사정이 극도로 나쁜 국내에서는 대통령까지 나서서 정부, 대사관, 현대건설이 협력하여 계약이 성사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대사관의 L공사는 N왕자를 현대건설의 에이전트로 선정하고 대통령에게 인사까지 시켰다. 그러나 그는 국왕의 동생이긴 하지만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정주영 회장이 실마리를 풀었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해상 터미널 전문업체인 브라운 앤드 루트사의 사장을 만나 담판을 진 것이었다. 그들의 장비를 임대하여 사용하는 내용의 기술협약을 맺었다. 여기에 힘입어 결정타를 친 것이 주무부의 토픽 장관이었다. 이름난 문학가인 그는 양심적이고 소신 있는 분으로 한국방문 때에 건설 중인 미포조선소를 보고 감탄한 것 같았다. 그는 낮은 가격이지만 현대건설이 성공적으로 완공할 수 있으며, 사우디정부 예산을 5억 달러 이상 절약할 수 있다는 점을 상부에 보고한 후 현대건설과 계약을 체결하였다. 주변의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용단을 내렸지만 왕자들의 힘이 막강한 왕국인지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고령이라는 이유로 두서너 달 후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후 대사와 나는 고마움을 잊을 길이 없어 매년 한두 차례 그의 집을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
이 공사는 사우디는 물론 세계 각국의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공사의 성패에 현대건설의 명운이 걸려있음은 물론 우리 업체의 사우디 진출의 길이 열리느냐 막히느냐가 달려 있었다. 25%나 덤핑한 공사인데다가 시공한 경험이 전혀 없는 초대형 공사를 빠듯한 공기 내에 과연 해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현대건설은 공기를 최대한 단축시키는 데 전력투구했다. 이 방법 밖에는 달리 없었다. 그런데 공사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큰 난관에 봉착했다. 먼저 걸프만의 바다를 메워 길이 9.3㎞, 폭 300m의 코스웨이를 축조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부닥쳤다. 5톤 트럭으로 20만대 분의 토석을 실어 나르는데 큰 바위는 한 개, 작은 바위는 두세 개씩 운반하였다. 마치 개미가 모래알을 한두 개씩 나르는 듯 하였다. 그 거리가 서울에서 대전가는 만큼인 155㎞나 되었다.
나는 공사현장을 갈 때마다 담맘에 있는 현대건설 석산에서 공사현장까지 가는 2차선 도로를 이용하면서 토석을 운반하는 모습을 눈여겨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통행차량이 그다지 많지 않아 하루에 서너 번씩 실어 날랐는데 날이 갈수록 교통량이 늘어나 그 횟수가 줄고 있었다. 공기가 빠듯한 형편인데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들 걱정이 태산 같아 무슨 묘안이 없을까 안절부절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걱정할 것이 없었다. 정 회장의 뚝심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공사현장 부근의 불모지와 사막을 샅샅이 뒤지도록 하였다. 용케도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하에 있는 석산을 찾아낸 것이었다. 마치 해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아내는 만큼 어려운 일을 기어코 해낸 것이었다.
또 한 가지 큰 문제는 스타비트 16만개를 만들어 방파제와 호안(護岸)에 설치하는 일이었다. 믹서트럭의 콘크리트를 일일이 크레인 바켓으로 받아 스타비트 거푸집에 퍼붓는 작업으로 하루에 200개 밖에 만들지 못했다. 이러다간 공기 내 완공이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정 회장은 콘크리트를 쏟아내는 믹서트럭의 구멍을 스타비트 거푸집 높이와 딱 맞게 개조하여 직접 연결함으로써 크레인을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알고 보면 간단한 일 같지만 완제품인 믹서트럭을 개조할 수 없다는 일반적인 고정관념을 과감히 깨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리하여 하루 생산량이 200개에서 350개로 늘어남으로써 공기를 단축시키고 인건비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가장 큰 고비는 해상터미널 공사였다. 코스웨이 끝머리에 유조선 네 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철 구조물로 된 부두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30m나 되는 깊은 바다에 구조물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저 암반의 강도 등 지질을 상세히 알아야 했다. 정 회장은 어떻게 알아냈는지 아람코의 기술고문으로 와 있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김영덕 박사를 만나 그를 설득하여 도움을 받았다. 내가 만난 그는 인격적으로 훌륭할 뿐만 아니라 열성을 다하여 일을 했다. 그의 조사 자료를 기초로 하여 구조물의 설계, 제작, 설치가 가능했다.
정 회장은 브라운 앤드 루트사와 협상할 때 시공 장비의 임대료를 10분의 1로 깎아내림으로써 공사비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여객선을 공사현장에 정박시켜 브라운 앤드 루트사를 포함한 국내외 기술자와 근로자가 함께 숙식을 하면서 일하게 하였다. 기술자와 기능공이 팀워크를 이루어 생산성을 높이고, 귀중한 기술 및 시공법을 전수받아 세계적인 해상구조물 시공업체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 할 수 있었다. 또한 출퇴근 시간을 절약하여 공기를 단축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가장 드라마틱한 일은 정 회장이 해상터미널 공사에 소요되는 철 구조물 전부를 울산에서 제작하여 바지선으로 운반하는 기상천외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다. 전문가나 기술자의 머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참으로 무모한 일이었다. 1만 2,000㎞에 이르는 바다 길에는 태풍과 악명 높은 인도의 계절풍이 도사리고 있었다. 철 구조물 하나의 크기가 가로 18m, 세로 20m, 높이 36m로서 10층 건물의 높이와 비슷했고, 무게는 550톤이나 되었다. 이러한 대형구조물을 바지선에 싣고 모두 19회에 걸쳐 89개를 실어 날랐는데, 단 한번 경미한 사고가 있었을 뿐이었다. 하늘의 도움이 없었다 할 순 없지만 왕회장의 뱃심이 해낸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철 구조물의 설치도 어려웠다. 수심이 30m나 되는 바다에서 직경 2미터의 관속으로 기술자가 들어가 강관을 암반에 고정시킨 후 중량이 550톤이나 되는 재킷을 20m 간격으로 정확하게 설치해야 했다. 허용오차는 5㎝에 불과했다. 우리 기술자와 기능공이 전혀 해본 경험이 없는 어렵고 정밀한 공사를 무난히 해내는 모습을 보고 나는 감격한 나머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 공사는 공기가 지연되고, 크게 덤핑한 탓으로 많은 손해가 날것으로 예상하였다. 공기 내에 완공만 해도 대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공기를 8개월이나 단축시켰다. 그리고 상당한 이익을 남겼다. 참으로 기적과 같은 신화를 창조한 것이었다. 운도 크게 따라주었고 간부사원, 기술자, 기능공의 피눈물 나는 노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뚝심이 결정타를 친 것이었다. 현장에서는 모두들 정주영 회장을 '왕회장'이라 불렀다.
나는 바쁜 가운데서도 열흘에 한 번 정도 공사현장에 가야했다. 대사관이 있는 제다에서 알코바까지 비행거리는 약 1,400㎞로서 서울에서 동경가기만한 거리였다. 그리고 다시 북쪽으로 120㎞ 더 가야했다. 이곳을 80회 이상 찾아간 것이었다. 비행거리만 지구를 여섯 바퀴 이상 도는 거리였다.
아무리 흥미진진한 영화나 드라마라 하더라도 몇 번만 보면 싫증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머나먼 공사현장을 오가면서 피곤하거나 지겹기는커녕 신바람이 났었다. 공사초기에는 무척 걱정스럽고 불안하였지만 웅대한 구조물 하나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깊은 감동에 사로잡혔다. 마치 내가 온 정열을 쏟아 힘든 작품을 하나하나 완성시켜 나가는 듯한 성취감과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공사가 실패로 끝났을 경우 현대건설이 망하고, 사우디 진출의 길이 막혀버린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정 회장은 온 정력을 여기에 쏟은 것 이다. 그의 특기인 뚝심과 모험 및 여러 차례에 걸친 기발한 아이디어로 중대한 고비를 잘 넘긴 것이었다. 더구나 이 공사를 발판으로 하여 현대건설은 국내 제일의 건설회사가 되었고 세계적인 업체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해외에서 각종 플랜트 공사를 시공하면서 습득한 세계 최첨단의 선진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재벌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는 현대건설뿐만 아니라 사우디에 진출한 우리업체와 나를 살리기도 한 것이었다.
허재영 전 건설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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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스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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